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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드 파크] 프로야구 맏형 3인의 은퇴 스토리

---Outside Park

by econo0706 2022. 9. 27.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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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23 

 

‘은퇴’라는 단어는 숨을 은(隱) 자와 물러날 퇴(退) 자를 쓴다. 이제 화려한 무대에서 물러날 시간이 왔다는 의미다. 야구선수는 유니폼을 입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스스로 결정했든, 구단이 권유했든, 혹은 방출을 당했든, 은퇴는 어쩔 수 없이 쓸쓸한 사건이다. 선수만 힘든 것도 아니다. 그 선수의 플레이에 열광하고 박수를 보냈던 팬들도 그들을 떠나보내기가 쉽지 않다. 

사람의 육체적 능력은 나이를 먹을수록 떨어진다. 베테랑 선수는 조금만 몸이 둔해져도 ‘세대교체’라는 명분의 희생양이 된다. 반대로 구단은 앞으로 팀의 미래를 책임져줄 유망주에게 더 많은 투자를 하고 싶어진다. 아무리 천하를 호령하던 선수라 해도 흐르는 시간은 막을 수 없다. 마지막이 온다. 

2016년 역시 한국 프로야구의 굵직굵직한 선수들이 은퇴 소식을 알렸다. LG 이병규와 두산 홍성흔, 그리고 ‘인간 승리’의 아이콘인 LG 정현욱 등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 홍성흔. /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오버맨’이 떠났다 


두산은 11월 22일 보도자료를 통해 “프랜차이즈 스타 홍성흔이 은퇴를 결심했다”고 전했다. 홍성흔은 경희대를 졸업하고 1999년 두산의 전신 OB에 1차 지명 선수로 입단했다. 그해 신인왕을 거머쥐며 화려하게 출발했다. 이후 그라운드에서 그 누구보다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오버맨’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였다. 허슬플레이의 대명사로 통했다. 2001년 두산의 한국시리즈 우승도 함께 했다. 

홍성흔은 2009년 FA가 돼 4년간 롯데 유니폼을 입었다. 롯데 시절 3할 타율을 세 번 기록했고, 도합 59홈런을 쳤다. ‘역대 최고의 야수 FA’라는 찬사도 받았다. 2013년에는 다시 FA 자격을 얻어 친정팀 두산에 복귀했다. 첫 두 시즌엔 베테랑 타자로서 제 몫을 해냈다. 하지만 2015년부터 2년간 좀처럼 출전 기회를 잡지 못했다. 후배 선수들에게 주전 자리를 내줬고, 부상까지 겹쳐 2군에 내려갔다. 올해 팀이 새로운 멤버들로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면서 홍성흔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결국 홍성흔은 고심 끝에 아름다운 마지막을 결심했다. 

홍성흔은 화려하고, 건실했다. 프로 통산 1957경기에 출장해 타율 0.301(6789타수 2046안타), 208홈런, 1120타점을 기록했다. 통산 안타(2046개)와 2루타(323개), 타점(1120점) 모두 역대 두산 타자들 가운데 가장 많다. 2015년 6월 14일 잠실 NC전에서는 오른손 타자 사상 최초로 통산 2000안타 고지를 밟는 위업을 달성했다. 

선수 생활 내내 ‘열정’과 ‘활기’의 아이콘이었던 홍성흔이다. 그는 “팀을 위해 언제나 더 나은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펼쳐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한 점에 자부심을 느낀다”며 “앞으로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선수’, ‘참 야구를 잘한 선수’보다 ‘최고가 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한 선수’, ‘열정적인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지금 가족과 시간을 보내면서 조용히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새해에는 해외에 나가 야구를 더 공부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인생의 전부였던 ‘야구’와 또 다른 인생을 함께 하기 위해서다. 

▲ 이병규. / 연합뉴스

 

# ‘적토마’도 떠났다 


LG를 대표하는 타자였던 ‘적토마’ 이병규(42)도 홍성흔과 같은 선택을 했다. 2017년 보류선수 명단 제출 마감일인 11월 25일을 하루 앞두고 은퇴를 발표했다. 그는 누구보다 LG의 ‘핀스트라이프’ 유니폼이 잘 어울리는 선수였다. 1997년 데뷔 첫 해부터 풀타임 주전으로 활약하면서 타율 0.305를 기록했고, 신인왕까지 거머쥐었다. 일본 주니치에 몸담았던 3년(2007~2009년)을 제외하면 1997년부터 줄곧 LG에서만 뛰었다. 

독보적인 ‘안타 제조기’였다. 3년 차였던 1999년 홈런 30개, 도루 31개를 기록해 잠실을 홈구장으로 쓰는 선수로는 최초로 30-30클럽에 가입했다. 그해부터 2001년까지 3년 연속 최다 안타 1위에 올랐다. 주니치에서의 3년은 순탄치 않았지만, 2010년 친정팀으로 돌아온 뒤에는 다시 명예를 회복했다. 2013년 최고령 사이클링히트 기록과 함께 최고령 타격왕에 올랐고, 시즌 직후 두 번째 FA 자격을 얻어 3년 총액 25억 5000만 원에 LG와 계약했다. 

그러나 40대에 접어든 2014년부터 하락세가 뚜렷했다. 그 사이 LG는 무서운 속도로 세대교체를 해나갔다. 이병규는 올해 아예 전력에서 제외됐다. 남은 선택은 둘 중 하나. 방출돼 다른 팀을 알아보거나, 지도자로서 LG에 남는 것이었다, LG를 사랑한 이병규는 후자를 택했다. 통산 1741경기에서 타율 0.311, 2043안타, 161홈런, 972타점, 992득점, 147도루의 성적을 남기고 유니폼을 벗기로 했다. 

다행히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할 기회는 얻었다. LG의 시즌 최종전인 10월 8일 잠실 두산전 4회 2사 1·2루서 이병규가 대타로 나왔다. 368일 만의 1군 경기, 그리고 시즌 처음이자 마지막 출전이었다. 그는 두산 에이스 더스틴 니퍼트의 초구 직구를 받아쳐 외야 왼쪽에 떨어지는 안타를 쳤다. 그리고 이어진 공격에서 2루수 윤진호로 교체됐다. 단 한 경기, 단 한 타석. 그래도 잠실구장을 가득 메운 LG팬들은 이병규에게 엄청난 함성과 응원을 보냈다. 계속 이병규의 이름을 연호했다. 이병규는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면서 팬들을 향해 오래오래 손을 흔들었다. 

▲ 정현욱. / 연합뉴스

 

# ‘국민 노예’가 사라졌다 


LG 정현욱(38) 역시 2016년를 마지막으로 공을 내려놓았다. 암을 극복하고 마운드에 다시 서서 팬들에게 ‘할 수 있다’는 감동과 희망을 전했던 정현욱이다. 그러나 파란만장했던 21년간의 프로선수 생활을 마감하기로 결정했다. 스스로 구단에 “유니폼을 벗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정현욱은 신인왕 출신인 이병규, 홍성흔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대기만성’의 상징과도 같은 선수였다. 1996년 삼성에 입단했지만, 1998년에 처음으로 1군 무대를 밟았다. 삼성 불펜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기 시작한 해는 입단 8년 만인 2003년. 그리고 5년이 더 흐른 2008년에야 리그에서도 알아주는 구원 투수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팬들이 기억하는 그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 천신만고 끝에 국가대표팀에 합류했던 투수가 불펜에서 전천후로 맹활약했다. 삼성의 ‘마당쇠’를 넘어 ‘국노(국민 노예)’로 승격됐다. ‘국노’는 은퇴할 때까지 그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던 별명이다. 

그는 2013년을 앞두고 FA 자격을 얻어 LG로 이적했다. 그러나 2014년 7월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 후 종합검진을 받다가 위암을 발견했다. 외부에 투병 사실을 알리지 않고 암세포와 싸웠다. 위를 모두 들어내면서 살이 빠지고 힘이 떨어졌지만, 굴하지 않고 버텼다. 긴 재활을 이겨낸 끝에 2016년 3월 시범경기에서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4월 15일 대전 한화전에선 647일 만에 1군 경기에 등판해 1043일 만에 세이브를 올렸다. 그리고 이날 똑같은 위암을 극복하고 돌아온 한화 정현석과 투타 맞대결도 펼쳐 뜨거운 박수도 받았다. 

정현욱의 재기는 프로야구팬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감동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구위에 만족하지 못한 순간 미련 없이 마운드에서 내려오기로 결정했다. 정현욱의 친정팀 삼성은 은퇴 소식을 듣고 곧바로 그에게 코치직을 제의했다. 삼성 시절 클럽하우스에서 훌륭한 리더 역할을 하던 모습을 떠올린 것이다. 정현욱도 삼성이 내민 손을 잡았다. 2017 시즌 친정팀 삼성의 1군 불펜 코치로 새 출발한다. 

 

배영은 / 일간스포츠 기자 

 

자료출처 : 일요신문 [제12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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