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프로야구 난투사] (30) 전두환의 한마디에 구속된 김진영 삼미 감독...그리고 삼미의 몰락
2013. 08. 06.
삼미 슈퍼스타즈는 한국 프로야구사의 ‘불청객’이었다. 이용일 한국야구위원회(KBO) 초대 사무총장에 따르면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작업을 할 무렵 원래 인천지역연고 배정기업은 OB(현 두산)였다. OB가 처음에는 서울을 원했으나 MBC에 밀려 인천을 택했다. 대전이 비어 있는 상황에서 삼미그룹 김현철 회장이 팀을 만들겠다고 자청, 결국 3년 뒤 OB가 서울로 연고지를 옮긴다는 조건을 달고 대전에, 삼미가 인천에 배정됐다는 것이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한국 프로야구사의 서글픈 추억이다. 삼미 구단을 떠올리는 일은 일정한 아픔을 동반한다. 1982년 2월 5일, 프로야구 창단 멤버로 합류했던 삼미는 한 시즌 팀 최다 기록인 18연패(1985년 3월 31일~4월 29일)의 어두운 기록을 품에 안은 채 1985년 5월 1일, 70억 원에 구단을 청보식품에 매각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삼미 슈퍼스타즈를 이어받은 청보 핀토스는 그러나 1988년 3월 8일에 태평양 돌핀스로 유니폼을 갈았고, 태평양 돌핀스는 1996년 3월 11일 현대 유니콘스에 넘어갔다. 초창기에 팀 창단을 외면했던 현대는 250억 원을 들여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했지만, 그마저 2007시즌을 끝으로 팀이 공중분해 되고 말았다. 슈퍼스타즈의 기구한 운명은 인천 프로야구의 부침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삼미 슈퍼스타즈가 한국야구사에 그 존재를 드러냈던 것은 불과 3년 3개월 남짓한 짧은 기간이었다. 1233일 만에 구단의 문을 닫아버렸던 삼미는 1983년에 전기 2위로 ‘하마터면’ 1위를 차지할 뻔했다. 그 시점은 숨을 거두기 직전, 마지막으로 존재의 불꽃을 반짝 피운 것 같은 환각마저 안겨준다. 그 때를 정점으로 삼미는 급격히 내리막길을 걸었고, 나머지 시즌엔 꼴찌를 도맡아했다. (1982년 전, 후기 최하위, 1983년 전기 2위, 후기 3위, 1984년 전, 후기 최하위, 1985년 전기 최하위)
그 격한 소용돌이 속에 재일교포 장명부(2005년 4월 13일 작고)와 인천의 프랜차이즈 스타 임호균이 있었다. 그리고 <슈퍼스타 감사용>이라는 영화로 인해 그 이름이 새삼스럽게 조명을 받았던 감사용도 빼놓을 수 없다.
소설가 박민규는 그의 출세작인 장편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책머리에 이렇게 섰다. ‘1할2푼5리의 승률로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그래서 친구들에게’라고. 박민규식 표현법을 좀 빌려서 쓴다면, 1할2푼5리는 ‘아, 이런 슈퍼스타즈라는 이름이 너무나 무색, 무참하게도’ 1982년 후기에 삼미 슈퍼스타즈가 기록(5승 35패)했던 승률이었다.
그랬던 삼미도 반전을 꾀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가 찾아왔다. 그 게 바로 1983년 6월 1일 밤 잠실구장에서 열렸던 MBC 청룡전이다. 그 경기를 분기점으로 삼미는 급격한 쇠락과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것도 당시 최고 권력자의 말 한마디가 빌미가 돼.
한국 프로야구사를 뒤바꿀 수도 있었던 그 게임에 등판한 것은 삼미의 에이스 임호균이었다.
그 날 임호균은 선발로 나서 역투를 거듭하며 MBC 선발 유종겸과 팽팽한 투수전을 벌였다. 마침내 운명의 순간이 다가왔다. 삼미는 0-1로 뒤져 있던 8회 초 2사 만루에서 최홍석의 좌전적시타로 3루 주자 이영구가 홈을 밟아 일단 동점을 만들었다. 그 뒤를 이어 2루 주자 이선웅도 홈으로 뛰어들었다.
그 장면에서 삼미의 명운을 좌우할 엄청난 사태가 벌어질 줄이야. 김동앙 주심이 주자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가 3루로 냅다 뛰었던 1루 주자 김진우가 이선웅이 홈플레이트를 밟기 전에 먼저 태그아웃 됐다고 판정, 득점을 인정하지 않는 바람에 1-1 동점 상황에서 이닝이 끝나버린 것이다.
▲ 심판에게 항의하는 김진영 감독 / 일간스포츠
그 대목에서 분노를 가누지 못한 김진영(당시48세) 삼미 감독이 득달같이 덕 아웃에서 뛰쳐나와 김동앙 주심에게 폭언과 삿대질로 거칠게 항의했다. 그 과정에서 이기역(당시 56세) 심판위원장이 기록실로 가서 기록원에게 장내방송으로 상황을 설명하라고 지시하고 나왔다. 김 감독은 그물망 뒤에 서 있던 이기역 심판에게 몸을 부딪치며 두 발차기를 시도했다. 다행히도 발차기는 빗나갔지만 이미 불행의 씨앗은 잉태됐다. 하필이면, 그 장면을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TV 중계 화면에서 보고만 것이다.
임호균은 9회 말 1사 2루에서 MBC 4번 타자 이종도에게 끝내기 적시타를 얻어맞고 1-2로 게임을 놓쳤다.
서울 강동경찰서는 밤 11시께 김진영 감독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입건, 조사를 마친 뒤 일단 풀어줬다.
KBO는 경찰에 선처를 바란다는 공문을 보내고 이용일 사무총장이 강동경찰서를 찾아가 ‘이미 자체 중징계도 내렸고 하니 자체 수습토록하겠다’고 호소했지만 허사였다. KBO는 2일 오전 상벌위원회를 열고 벌금 100만 원의 중징계를 내렸다. 당시 액수로 봐서 거액이었고, 그 같은 조치는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사정기관의 칼날을 중징계로 피해보자는 심리가 작용했지만, 소용없었다. 사정기관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2일 하오 3시께 이종남 서울지검장이 김 감독의 구속을 지시했다. 서울 강동경찰서는 2일 하오 서울지법 동부지원 김시수 판사로부터 김 감독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 받고 즉시 형사대를 부산으로 보냈다.
롯데와의 부산 게임 직후 밤 10시께 부산 구덕경기장 선수대기실에 구속을 집행하려는 경찰관계자들이 들이닥쳐 김진영 감독을 연행했다. 그 과정에서 선수들과 실랑이도 벌어졌다.
김진영 감독은 결국 밤 11시께 선수단 숙소인 플라자 호텔에서 임의동행 형식으로 따라나서 3일 상오 8시 서울 강동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다. 삼미 구단은 안동일 변호사를 변호인으로 선임했다.
말 한마디만 잘 못해도 가막소에 달려 들어가던 서슬 푸른 시절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 눈에 그 장면이 고스란히 잡혔으니. 김 감독은 졸지에 ‘사회정화 차원의 경기장 폭력 근절’의 본보기로 찍혀 영어의 몸이 된 것이다.
6개 구단은 7일 구단주 결의문을 채택, 폭력 재발 방지를 결의했다. 그날 김 감독은 검찰에 송치, 성동구치소에 수감됐다. 그로부터 5일 뒤인 11일 김 감독은 검찰의 벌금 100만 원 약식 기소로 그날 오전 10시께 석방됐다. 김 감독은 풀려나기 전 서울지검 동부지청 박종렬 검사에게 ‘앞으로 주의하겠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썼다.
▲ 성동구치소에서 풀려나는 김진영 감독 / 일간스포츠
임호균은 그 때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하염없는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당시 삼미는 장명부와 둘이서 마운드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 때가 우승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결국 졌다. 김진우가 3루에서 아웃 된 시점보다 이선웅이 홈에 먼저 들어왔다고 생각했지만 득점은 인정되지 않았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김진영 감독도 연루가 안됐을 텐데, 지금 생각해봐도 안타깝고,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경기였다. (그 경기는 KBS-TV가 생중계를 했다. 훗날 임호균과 식사를 함께하는 자리에서 김광철 전 심판위원장은 “TV 화면상으로도 분명히 김진우의 태그아웃이 이선웅의 홈인보다 두 발은 빨랐다. 2루 주자였던 이선웅이 뒤(3루 쪽)를 힐끔 쳐다보면서 들어오는 바람에 늦은 것이다”고 강조했지만, 임호균은 오히려 “이선웅이 두 발 빨랐다”고 상반된 주장을 폈다)
김진영 감독의 전선 이탈로 삼미는 지휘체계에 누수가 생겼고 팀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김 감독이 수감돼 있는 사이, 삼미는 급기야 6월 7~9일 사이에 열렸던 해태와의 광주 3연전을 모조리 내주고 역전 당해 1위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선두다툼의 최대 고비를 넘기지 못한 것이다. 당시 삼미는 2위 해태에 2.5게임차로 앞서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김진영 감독은 사건 후 9일 만에 자유의 몸이 됐지만 시즌을 마칠 때까지 덕 아웃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자숙’을 하라는 엄명이 있었던 것이다.
임호균은 “당시 삼미는 코리안 시리즈로 올라갈 만한 여건이 됐다. 만약 김진영 감독 구속사태만 없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고 못내 아쉬워했다.
김진영 감독을 비롯해 김응룡 당시 해태 타이거즈 감독 등이 경기장에서의 폭력 등으로 구속될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발 벗고 나서 ‘구출’해냈던 이용일 초대 사무총장의 증언을 들어보자.
“그 당시에 그런 질서 문란한 것에 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곳은 검찰도, 경찰도 아니고 사회정화위원회였다. 마침 전두환이 중계를 보고 있다가 정화위원장한테 ‘(19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이런 짓을 하면 되겠어, 혼을 내줘서 이런 일이 없도록 하시오’하고 지시를 내렸다. 전두환이 한마디 하니까 정화위에서 바로 검찰에 지시, 그 바람에 김진영이 구속된 것이다.”
KBO는 김진영 감독 구속 후 서종철 총재가 선처를 호소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서종철 총재는 시쳇말로 전두환의 사부 격이 아니었던가.
이용일 총장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사회정화위원회로 갔다. 당시 그라운드에 사건이 생기면 툭하면 사회정화위원회에서 KBO 관계자를 ‘오라, 가라’ 할 때였다.
“정화위원회 관계는 대통령이 직접 지시를 내렸다. 내가 (정화위에) 가서 위원장이나 사무총장이나 담당 국장을 만나 해결했다. 그 때는 김진영, 김응룡(김진영 구속 사태 후 보름이 채 지나지 않은 1983년 6월 14일에 대전구장에서 OB와의 경기를 마치고 파울타구에 대한 심판판정에 불만을 품고 심판 실을 찾아가 심판에게 폭언과 폭력을 행사, 그날 밤 10시께 대전경찰서 유치장에 수감) 사건 말고도 다른 몇 건이 더 있어 간 적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다 내가 책임지겠다, 앞으로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그래서 김응룡, 김진영도 (정화위가) 어느 정도 납득해서 풀려난 것이다. (야구장에서) 사고가 나면 사회정화위원회에서 KBO로 곧바로 연락이 왔다. 그렇다고 문서로 무슨 각서 같은 걸 쓰지는 않았고, 좋도록 얘기를 해서 풀었다.”
왜 삼미 슈퍼스타즈는 여태껏, 괜스레 우리네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드는가. 권력자의 말 한마디에 감독이 구속되고, 끝내 팀마저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사라진 시대에 생존을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쳤던 삼미 슈퍼스타즈는 여전히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남아 있다.
홍윤표 선임기자
자료출처 : OS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