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04. 11
특급 투수가 되는 법은 아주 간단하다. 강속구와 제구력을 겸비하면 된다. 멀게는 해태 선동열과 롯데 최동원부터 가깝게는 LA 다저스 류현진과 콜로라도 오승환까지, 한국 프로야구를 주름잡은 투수들은 모두 그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행운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구속’ 면에 있어서는 더 그렇다. 제구력은 훈련으로 어느 정도 나아질 수 있지만, 구속은 선천적인 능력에 의해 좌우된다는 게 정설에 가깝기 때문이다.
특히 ‘시속 150㎞’는 노력만으로 도달할 수 없는 스피드의 상징적 마지노선으로 여겨진다. 시속 150㎞ 직구를 던지거나 향후 던질 가능성이 있는 고교 투수가 프로에 입단하지 못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일단 신이 내린 선물 하나를 한쪽 손에 쥐고 출발할 수 있어서다. 구속은 최고와 최저에 순위를 매기는 야구의 공식 기록이 아니지만, 상대 타자를 힘으로 윽박지르는 투수의 빠른공은 숫자 이상의 마력을 지닌다. 수많은 야구팬이 여전히 빛처럼 빠르게 날아가 포수 미트에 묵직하게 꽂히는 강속구에 열광하는 이유다.
올 시즌에는 유독 전광판에 시속 150㎞를 찍는 투수들이 늘어나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새로 온 외국인 투수부터 해외리그 생활을 끝내고 한국에 온 투수, 당차게 출발한 고졸 신인까지 면면도 다양하다. 한동안 제구력의 가치에 몰두하던 KBO 리그가 다시 강속구의 매력에 사로잡히는 모양새다. 아직 날이 채 풀리지 않은 4월인데도 연일 강속구 소식이 업데이트되는 상황이라 본격적으로 기온이 올라가는 5월부터는 더 뜨거운 강속구 대결을 예감케 한다.
# 2019시즌 최고의 파이어볼러는 누구일까
KT 새 외국인 투수 라울 알칸타라와 KIA 새 외국인 투수 제이콥 터너는 입단 전부터 ‘광속구’ 투수로 이름을 날렸다. 알칸타라는 2017년 메이저리그 오클랜드에서 직구 최고 시속 158㎞를 찍은 파이어볼러다. 최고도 아닌 평균 구속이 시속 154㎞에 달했을 정도다. 터너는 2016년에 최고 시속 159㎞ 직구를 뿌린 적이 있고, 디트로이트에서 뛰던 지난해에도 직구 평균 시속 153㎞를 기록했다. 둘 다 KBO 리그에서 쉽게 보기 어려운 스피드를 자랑한다.
터너는 실전 등판에서도 빠른공의 위력을 발휘했다. 시즌 첫 퀄리티스타트를 달성한 4월 5일 광주 키움전에서 최고 시속 153㎞ 직구를 앞세워 삼진 9개를 잡아냈다. 포크볼 구속이 웬만한 국내 투수 직구보다 빠른 시속 145㎞로 측정됐다. 알칸타라는 어깨 상태가 좋지 않아 개막 로테이션을 한 차례 걸렀다. 아직 구속을 끌어 올리는 과정에 있다. 하지만 컨디션이 나쁘지 않았던 스프링캠프에서 일찌감치 시속 153㎞를 찍는 능력을 보여줬다.
기존 외국인 투수 가운데 가장 구속이 빠른 선수는 SK 앙헬 산체스다. 지난 시즌 직구 평균 시속 151㎞로 10개 구단 투수 가운데 최고를 기록했다. 평균이 아닌 최고 구속 1위는 LG 소속이던 레다메스 리즈의 손끝에서 나왔다. 무려 시속 159㎞다. 리즈는 2012년 9월 24일 인천 SK전에서 1회 조동화를 상대로 시속 162㎞짜리 공을 던진 적도 있다. 2011년 투구 추적 시스템(PTS) 도입 이후 KBO 리그 역대 최고 구속이다. 하지만 리즈는 지난 시즌을 끝으로 한국을 떠났다. 최강자가 된 산체스와 터너, 알칸타라의 강속구 3파전도 기대를 모으는 요소다.
국내 투수들 가운데선 SK의 ‘서른살 신인’ 하재훈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올해 신인드래프트에서 2차 2라운드(전체 16순위)에 지명된 하재훈은 시카고 컵스 마이너리그와 일본 프로야구 야쿠르트, 일본 독립리그를 두루 거치는 동안 외야수와 투수 사이를 오갔다. SK는 하재훈의 강한 어깨에 주목해 투수로 정착시켰다. 플로리다 스프링캠프에서 최고 시속 155㎞를 기록했고, 개막 이후에도 불펜으로 등판해 최고 시속 151㎞를 던져 눈길을 끌었다.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했다가 다시 투수로 돌아온 SK 강지광도 불펜에서 최고 시속 153㎞를 찍어 이름값을 했다. 특히 3월 24일 인천 KT전에서는 마운드에서 던진 직구 6개가 모두 시속 151㎞를 넘어 화제가 됐다.
키움 마무리 투수 조상우도 다시 특유의 파워 피칭으로 마운드를 달구고 있다. 2014년 데뷔한 조상우는 KBO 리그 대표 강속구 투수 계보를 이을 유력한 후계자다. 대전고 시절에 이미 한 차례 시속 154㎞를 던진 경험이 있고, 데뷔 첫 해 SK와의 개막전에서 전광판에 시속 156㎞를 찍어 6년 만에 ‘155㎞의 벽’을 넘은 국내 투수로 기록됐다. 정통파와 사이드암의 사이인 스리쿼터 투구폼으로도 시속 150㎞를 쉽게 넘겨 더 화제였다. 그는 지난해 5월 불미스러운 일에 휩싸여 경기에 나서지 못했지만, 올해 초 무혐의 처분을 받고 출전정지 징계가 해제돼 다시 전열에 복귀했다. 그와 동시에 3월 28일 잠실 두산전에서 시속 156㎞ 직구를 다시 뿌려 개막 첫 주 주간 구속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완벽한 복귀 신고였다.
▲ ‘돌아온 파이어볼러’ 키움 히어로즈 마무리 투수 조상우. 2019시즌 최고 파이어볼러 후보 중 한 명이다. / 연합뉴스
조상우의 팀 후배인 안우진도 4월 10일 고척 KT전에서 최고 시속 150㎞를 찍으면서 서서히 구속을 끌어 올리고 있다. 안우진은 SK 에이스 김광현처럼 KBO 리그에 흔치 않은 강속구 선발투수로 성장할 수 있는 유망주다. 지난해 포스트시즌에서 가능성을 입증했고, 올해도 출발이 좋다.
올해 KIA에 입단한 왼손 신인 투수 김기훈도 그 뒤를 이을 기대주다.지난해 국내 투수 가운데 직구 평균 구속(시속 149㎞)이 가장 빨랐던 KIA 한승혁은 스프링캠프에서 허벅지 안쪽 근육을 다쳐 마운드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복귀하기만 하면 시속 150㎞대 중반까지 던질 수 있는 투수다. LG 고우석은 꾸준히 최고 시속 150㎞대 초반, 평균 시속 140㎞대 후반을 기록하고 있다. LG는 고우석에게 필승조 역할을 맡겼다.
# 과거 대표적 강속구 투수로 이름 날린 인물은?
사실 시속 150㎞를 훌쩍 넘는 스피드로 이름을 널리 알린 투수들은 이전에도 존재했다.하지만 고질적인 부상이나 제구 불안으로 재능을 크게 꽃피우지 못한 선수가 대부분이다. 삼성 한기주도 그랬다. 그는 2006년 KIA에 입단하면서 지금까지 신인 역대 최고액으로 남아 있는 계약금 10억 원을 받았다. 그만큼 초특급 유망주로 기대를 받았다는 의미다. 그 이유가 한기주의 구속에 있다. 비록 비공인 기록이지만, 한기주는 KBO 리그에서 역대 가장 빠른 공을 던진 한국인 투수로 남아 있다. 2008년 5월 8일 광주 삼성전과 같은 달 27일 인천 SK전에서 시속 159㎞에 달하는 강속구를 뿌린 덕분이다. 한 해 전인 2007년 5월 25일 인천 SK전에서는시속 158㎞를 던지기도 했다. 수 차례 발목을 잡은 어깨와 팔꿈치 부상이 없었다면, 새 역사를 만들 수도 있었던 투수다.
SK에서 은퇴한 엄정욱도 성적 대신 시속 160㎞에 육박하는 강속구로 확실한 족적을 남겼다. 역대 최초로 공식 경기에서 전광판에 ‘158㎞’를 찍은 주인공이다. 그는 2003년 4월 27일 인천 한화전, 이듬해인 2004년 6월 29일 인천 KIA전에서 각각 시속 158㎞를 던졌다. 비공식 경기에서는 더 빠른 공을 던졌다는 증거도 있다. 한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은 엄정욱이 상무 야구단과의 연습경기에서 스피드건 기준 시속 163㎞를 기록한 장면을 방영했고, 구단 관계자들은 “엄정욱이 2003년 스프링캠프에서도 시속 160㎞를 찍었다”고 증언했다. 한동안 부상으로 고생하다 복귀했던 2010년 4월에도 최고 시속 151㎞를 기록해 다른 투수들의 부러움을 샀다.
두산 최대성도 롯데 소속이던 2007년 5월 10일 인천 SK전에서 시속 158㎞를 기록해 엄정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날 최대성의 직구가 모두 155∼158㎞ 사이에 형성됐을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다만 늘 제구력과 경기 운영능력이 단점으로 지적돼 최고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다. 프로 16번째 시즌에 접어든 올해 두산에서 강속구의 위력을 앞세워 새 출발을 다짐하고 있다.
두산의 또 다른 파이어볼러 이동원은 매년 스프링캠프에서 시속 150㎞대 후반에 이르는 파워를 자랑해 화제에 오르는 투수다. 그 역시 컨트롤이 들쭉날쭉해 좀처럼 2군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다. 1군에서 안정적으로 활약하기만 한다면, 구속 관련 역사를 새로 쓸 수도 있는 자원이다.
▲ 한국 야구 역사상 손꼽히는 강속구를 자랑했던 박찬호. / 연합뉴스
물론 가장 빠른 공을 던진 한국인 투수는 KBO리그 밖에서 나왔다. 구속이 하도 빨라 ‘코리안 특급’이라는 별명까지 생겼던 박찬호다. LA 다저스 시절이던 1996년 구단 스피드건에 시속 161㎞를 찍었다. 고교 시절부터 이미 강속구로 이름을 날렸고, 한양대 재학 시절 메이저리그의 러브콜을 받았다. 전성기 때는 직구 평균 시속이 150㎞를 훌쩍 넘을 정도로 대단한 파워 피처였다.
지난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임창용도 일본 야쿠르트 시절이던 2009년에 전광판 기준 최고 시속 161㎞를 찍었다. 당시 일본 프로야구 역대 2번째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구단 스피드건(시속 158㎞) 속도와 달라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어느 쪽이든 엄청난 구속인 건 확실하다. 사이드암으로도 시속 155㎞까지 던졌던 임창용은 당시 팔각도를 스리쿼터로 바꾼 뒤 구속이 더 올라갔다.
배영은 / 일간스포츠 기자
자료출처 : 일요신문 [제14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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