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 - 김진경
어릴 때 나는 검은 타이야표 통고무신을 신은 채
까맣게 그을린 배가 툭 튀어 나와 있었고,
동네 논에 불시착한 헬리콥터에서
쑤알라거리면서 내리는 미군은
사랑이니 평화니 말하기에는 우주인처럼 생소해서
내 친구의 아버지는 망가진 벼값을 받을 수 없었다.
군에서 휴가 나왔을 때에 빌리 그레함이 왔고
여의도엔 300만 인가가 모였고, 어머니도 그 중에 하나였고
비가 오려고 했으므로 우산을 들고 어머니를 찾으러 갔고
300만은 기도하고 있었다.
사할린, 만주 등등에 있는 동포들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그때 가까이 서울에 있는 동포 중에는
밀린 임금을 받으려 단식하다 떨어져 죽기도 했으므로
나는 사람들이 갑자기 멀리 있는 것을 사랑하기 시작한 데 놀랐고
빌리 그레함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헬리콥터에 올라 여의도를 한 바퀴 돌았고,
사람들은 무슨 신음 소리를 냈으므로
나는 그가 대단한 우주인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빌리 그레함은 다시 왔다.
이번에는 어릴 때의 나처럼 배를 툭 내밀고
눈에서, 심장에서, 손끝에서 번갈아 불빛을 반짝이며
광화문에서, 종로에서, 영등포에서
사랑과 평화의 대군단을 이루었다.
더욱 멀리 있는 것을 사랑하라.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과 평화를 우주인에게
그때 서울에서는 모처럼의 봄이 지나갔고
사람들은 고개를 움츠리며 코트 깃을 세웠고
가까이 있는 것들은 무관심 속에 죽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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