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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추억, 예순 일곱 번째] 김인호, 인천의 1번 타자

--김은식 야구

by econo0706 2022. 11. 22.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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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0. 17 

 

우직하고 무모했던 '야구공 헤딩' 사건

 

현대 유니콘스와 쌍방울 레이더스가 플레이오프 1차전을 벌이던 1996년 10월 7일. 3시간 5분 동안 서로 단 한 점도 내지 못한 채 팽팽하게 맞서던 9회말 레이더스 선두타자로 나선 대타 박철우는 유니콘스의 전설적 마무리투수 정명원의 2구를 받아쳤다.

그 공은 하늘을 갈라 가운데 쪽 외야 스탠드 중간에 꽂혀버렸다. 두 해 전 트윈스 김선진이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때려냈던 김홍집의 공보다도 훨씬 빨랐다. 너무나 갑작스런 한 방에 미처 환호성도 터지지 못했던 그 짧은 순간, 인천 팬들의 기억 속에서도 두 해 전의 악몽이 화들짝 깨어났다.

김인호, 야구공에 '헤딩'을 하다

 타격훈련을 하고 있는 김인호 선수 / ⓒ 현대 유니콘스 팬북


다음 날 치러진 2차전에 유니콘스 마운드에 오른 선발투수는 김홍집이었다. 그 해 패전처리로만 10 게임에 나서 단 한 개의 승·패·세이브도 기록하지 못한 그를 밀리고 있는 포스트시즌 단기전 선발로 내세운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다. 어쩌면, 먼저 한 경기를 내주고도 전세를 뒤집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독한 징크스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선수와 팬들의 투지를 끄집어내 맞불을 놓는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을 신인감독 김재박도 느꼈는지 모른다. 

비장하게 입을 앙다문 김홍집은 기세가 오른 홈팀 레이더스의 돌격대 타선을 5회까지 1안타로 잠재웠고, 괴물신인 박재홍은 선제 솔로 홈런으로 승기를 잡았다. 그러나 '역시 김홍집' '역시 박재홍'이라는 안도의 한숨이 채 흩어지기도 전에, 곧바로 이어진 6회말 레이더스 타선은 약이라도 올리듯 딱 두 점을 뽑아내며 희망을 꺾어놓고 말았다. 2연패.

3선승제의 플레이오프에서 먼저 한 경기를 이기고도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한 팀은 그때까지 없었다. 더구나 두 경기를 먼저 이기고도 실패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다음 날부터 스포츠 신문 머리를 장식한 신조어는 '호남선 시리즈'였다. 미리 한국시리즈에 직행해있던 전남 팀 해태 타이거즈와 전북 팀 쌍방울 레이더스가 광주와 전주를 오가며 한국시리즈를 치르게 될 거라는 얘기였다.

인천으로 옮긴 플레이오프 3차전, 유니콘스의 회생을 기대하는 팬들은 많지 않았다. 다만, 홈에서 최소한 한 경기만큼은 통쾌하게 잡아내며 '속풀이'를 해주기를 원했을 뿐이었다.

3회말. 포수 장광호가 1사 후에 안타를 치고 나갔고, 신인 박진만이 몸 쪽 공을 피하지 않고 맞고 나갔다. 관중석에서는 '그렇지'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김재박 감독의 선수시절을 연상케 하는 물 흐르는 듯한 수비와 2할8푼대의 쏠쏠한 방망이 실력을 선보이며 등장한 앳된 얼굴의 열아홉 살 소년의 대견한 투지를 보는 흐뭇함이었다. 1사 1·2루.

타자 김인호, 눈 꾹 감고 야구공에 헤딩하다

그러나 그 경기의 가장 놀라운 장면을 연출한 것은 다음 타자 김인호였다. 몸에 맞는 공을 내준 부담 때문에 어깨가 굳었던지, 아니면 다시 한 번 몸 쪽을 위협하며 기세를 놓지 않으려는 투지였던지, 김원형의 공은 김인호의 머리 쪽으로 날았다. 생각을 떠난 본능이 주저앉을 것을 명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김인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눈을 꾹 감고, 공 앞을 막아섰다.

'퍽!'

헬멧을 때린 공은 힘없이 그라운드를 굴렀고, 관중들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사이 김인호는 잠시 고개를 흔들어 보이며 1루로 뛰어나갔다. 이른바 '김인호의 헤딩 사건'이었다.

이미 한참 기울어진 싸움의 복판에서 기세가 오른 적들의 돌격을 맨 몸으로 막아선 19세 신인과 서른 살 베테랑의 연속 사구. 게다가 목숨까지는 아니더라도 선수 생명은 걸어야 했을 비장한 '헤딩'까지. 바로 그 순간, 예민한 이들은 기세와 운이 미묘하게 한 쪽에서 다른 한 쪽으로 옮겨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만루 상황에서, 당황한 김원형은 카운트를 잡기 위해 정 가운데로 초구를 찔러 넣었다. 그러나 그 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초구의 사나이' 윤덕규였다. 열이면 아홉, 초구를 노렸던 그의 풀스윙에 제대로 걸린 공은 우중간을 예리하게 갈랐고, 세 명의 주자는 차례로 홈을 밟아냈다. 그 날 3대 0의 최종 스코어를 만들어낸 3타점 결승 3루타였다.

승기를 잡은 유니콘스는 다음 날 이어진 인천 4차전과 하루건너 13일에 잠실에서 벌어진 최종 5차전을 잇따라 잡아내며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4차전은 8회말에 터져 나온 대타 김상국의 결승 3루타가, 그리고 5차전은 4회와 5회 이숭용, 박진만이 착실하게 띄워 올린 희생플라이가 결승점이 되었다.

비록 한국시리즈에서는 정명원이 사상 첫 한국시리즈 노히트노런을 성공시키며 맞서고도 전성기 호랑이군단의 저력 앞에서 2승 4패로 패퇴해야 했지만, 그 해 플레이오프는 인천 팬들에게 어떤 징크스도 깨고 나갈 수 있다는 용기와, 또한 두 해 전 한국시리즈 1차전 끝내기홈런의 쓰린 기억을 덮을 수 있는 위로를 던져준 사건이었다.

우여곡절의 인천 팀 톱타자

 현대 유니콘스 2군 코치로 활약하고 있는 김인호 / ⓒ 현대 유니콘스 홈페이지


현대 유니콘스가 롯데 자이언츠에서 전준호를 데려왔던 1997년 이전까지, 인천 팀의 가장 큰 고민은 마땅한 톱타자가 없다는 점이었다. 다소 과분하나마 '투수왕국'이라는 별명을 가지기도 했고, 김경기와 김동기가 그리 처지지 않는 중심타선을 구축하기도 했지만, 김일권 이후 상대 수비진의 전열을 흐트러뜨리며 좀 더 많은 득점의 기회를 만들어줄 선두타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 빈곤한 공격력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것이다.

때로는 김성갑, 때로는 염경엽, 또 때로는 이희성이나 여태구를 집어넣어보기도 했지만 우선은 워낙 낮은 출루율이 문제였고, 발은 제법 빠르더라도 상대 배터리와 쉼 없이 신경전을 벌이는 '파이팅'이 부족했다.

일이 이상하게 꼬이려니 심지어 96년, 돌핀스를 사들여 유니콘스로 야심차게 새 출발한 현대가 10승대 선발투수 최상덕을 내주고 잡은 국가대표팀의 1번타자 박재홍은 등장하자마자 4번 김경기보다도 많은 홈런과 장타를 때려내는 바람에 3번으로 옮겨 앉히느라 다시 비워져야 했던 것이 인천 팀의 사연 많은 1번이었다.

그래서 그 이전 몇 해 동안 되풀이된 것이었지만, 결국 1996년에도 결론은 김인호였다. 생애 최고의 타율이 .256일 정도로 빈곤했던 공격력에 두 자릿수 도루를 기록한 것도 두 번에 불과한 평범한 발. 그리고 전반기동안은 그럭저럭 체면을 세우다가도 후반기만 되면 1할도 못되는 타율로 죽을 쑤던 허약한 체력. 그러나 이런 저런 선수들을 갖다 넣어 보아도, 김인호 만큼의 존재감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그다지 재능 있는 선수는 아니었다. 공·수·주, 따로 떼어놓고 보면 딱히 못하는 것은 없었지만 별달리 빼어난 것도 없는 선수. 그래서 팀에 있으면 언제고 한 번씩 쓸 일은 있었지만, 주전으로 내놓고 쓰기에는 아쉬움이 많은 선수가 그였다.

진흥고와 성균관대 시절에도 그는 항상 '기본을 하는' 모범생이긴 했지만, 뚜렷하게 주목을 이끌어내는 우등생은 아니었다. 데뷔 첫 해 롯데 자이언츠에서도 2할에 못 미치는 성적으로 밀려나왔고, 최약체 팀 돌핀스에서도 내내 내야와 외야를 오가는 대수비와 대주자, 희생번트를 위한 대타가 그의 자리였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선수였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기를 이끌어나가는 선수였다. 그는 때마다 폭발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은근한 화롯불처럼 끈질기게 온기를 밀어 올리는 묵직한 투지로 들끓는 사람이었다.

박재홍 대신 톱타자로서 주전 자리를 굳혔던 1996년에도, 그의 타율은 .227에 불과했다. 그러나 11개의 홈런을 때려냈고 25개의 도루를 성공시켰으며, 무려 15개의 공을 몸에 맞으며 1루를 밟았다. 그리고 기록으로 남지는 않았지만, 아웃카운트 하나를 아끼고 한 개의 진루를 얻어내기 위한 헌신적인 플레이를 팬들의 기억 속에만 쌓아올렸다.

그의 번트는 전준호의 것처럼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절대 자신의 책임을 완수하고야 말겠다는 투지가 담겨 있었다. 안타, 아니 진루타를 못 치는 한이 있더라도 허무한 주루사는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사인이 노출되고 주자가 달리는 상황에서 옆으로 빼는 공이 들어올 때면 방망이를 쥔 채 그라운드를 날아 파울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유니폼은 항상 지저분했고, 심지어 요령 없이 굴려댄 얼굴은 종종 코피를 머금은 채 화면에 잡히기도 했다. 그렇게 소리도 나지 않고 기록으로도 남지 않는 그의 조용한 투지와 근성은, 오로지 인천 팀의 팬들 눈에만 보이는 묵직한 존재감이기도 했다.

1996년, 레이더스와 맞붙기 전 이글스와 치렀던 준플레이오프 두 경기에서 단 한 개의 홈런이나 결승타도 없이 무실점 호투한 에이스 정민태와 홈런을 날린 박재홍, 김경기를 제치고 준플레이오프 MVP로 선정되는 불가사의를 만들어냈던 것처럼 말이다.

최고는 아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했다

 현대 유니콘스 2군 코치, 김인호 / ⓒ 현대 유니콘스 홈페이지


누구나, 무엇이든, 꾸준히 온 힘을 다 해 노력하기만 하면 이룰 수 있다는 말을 우리는 종종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애초에 되지 않을 일이 있고, 해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대부분은 최선을 다해도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될 수 없다. 사실 대개는 알고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최고가 될 수 없다고 해서 도전하고 노력할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최고'나 '최악'이라는 것은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붙인 꼬리표일 뿐이며, 진심으로 최선을 다할 때만 비로소 맛볼 수 있는 행복이야말로 우리 삶의 가장 기름진 연료이기 때문이다.

13년간의 선수생활동안 통산 타율 .230, 홈런 52개, 도루 99개. 김인호는 절대 최고의 선수가 아니며 중간도 따라가지 못한 선수였다. 그러나 그의 유니폼에 묻어있던 흙먼지, 그리고 그것을 지저분한 얼룩으로 물들였던 땀과 애처로운 코피 자국들. 혹은 진저리쳐지게 무모했던 '헤딩'의 순간. 기록도 되지 않는 그것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그 삶의 울림을 느끼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지한 야구팬들에게만 허락된 특권이 아닐까?

 

김은식(punctum)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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