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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 다산의 해배(解配)를 도와준 사람

풀어쓰는 茶山이야기

by econo0706 2007. 7. 10.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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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18년의 긴긴 유배살이, 큰 죄를 지었다는 죄의식도 없이 창살 없는 감옥살이는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황현(黃玹)의 저서 『매천야록』에는 순조의 장인이며 안동김씨 실세(實勢)이던 김조순(金祖淳)의 도움이 컸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산 자신의 기록인 「자찬묘지명」에는 “무인(戊寅:1818)년 여름에 응교(應敎) 이태순(李泰淳:1759-1840)이 상소하여 ‘정계(停啓)가 되었는데도 의금부에서 석방 공문을 보내지 않은 것은 국조(國朝)이래 아직까지 없던 일입니다. 여기서 파생될 폐단이 얼마나 많을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하자… 마침내 공문을 보내어 내가 풀려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무인년 9월 15일이었다.”(戊寅夏 應敎李泰淳上疏 言臺啓停而府關不發 此國朝以來所未有者 流弊將無窮…乃發關 鏞得還鄕里 卽嘉慶戊寅九月之望也) 이렇게 이태순이 상소하여 자신이 풀려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이태순은 누구일까요. 오늘 마침 경상북도 안동에서 문집 1책이 왔는데 바로 『초초암문집(草草庵文集)』인데 책을 열어보니 초초암은 이태순의 호이고, 그 문집은 이태순의 유집이었습니다. 반갑고 기뻐서 책을 넘기며 대강 읽어보았더니 옛날 경상도 예안(禮安) 출신(지금의 안동)인 초초암은, 다산이 그렇게도 숭모하면서 학문의 귀의처로 여겼던 퇴계 이황선생의 후손으로, 태어나기는 다산보다 3년 먼저이지만 세상을 뜨기는 다산보다 4년 뒤였습니다. 82세의 장수를 누린 퇴계 후손으로 다산이 귀양 가던 1801년 43세에야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해서 다산과 같은 때에 벼슬을 했던 적도 없었던 사이였습니다.
 
홍문관(弘文館) 부응교(副應敎)의 직책으로 무인(1818)년에 올렸다는 상소문을 문집에서 읽어보니 이태순은 대단한 학자이자 정직하고 곧은 벼슬아치였습니다. 당시 남인계열 시파(時派)라는 이유로 정치적 탄압으로 귀양살거나 벼슬길이 막힌 사람들을 풀어주고 벼슬길에 오르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 내용입니다.
 
그런 정직하고 곧은 선비 벼슬아치가 있었기에 다산은 풀려났고, 퇴계는 그런 후손들을 두었기에 세상에 그 이름을 더 크게 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학자란 마땅히 불의를 보고 직언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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