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0. 16
“마치 인생의 패배자가 된 것 같다.”
한화 이글스 사령탑으로 보낸 지난 2년간을 되돌아보는 김응룡 감독(74)의 말에는 진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지도자로,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었던 그로서도 한화에서의 ‘실패’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듯하다.
지난 10월 14일, 서울의 한 식당에서 만나 점심을 함께하며 한화의 2년간을 반추한 김응룡 감독은 감독 연장에 대한 미련을 이미 접은 탓인지 얼굴은 밝고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속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지는 것에 익숙해져버린 한화 선수단 얘기를 할 때면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승부사 기질이 유난한 그로선 스스로도 용납하기 어려웠을 법하다.
“(한화 구단이 감독 제의를 했을 때) 집 사람이 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 하는 말끝에선 알듯 말듯 한 여운이 밀려왔다.
“32살에 한일은행에서 감독 생활을 시작 한 뒤 프로 감독으로 30년 세월을 보냈는데, 지난 2년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패배의식은 무섭다. 지는 것 이상 어려운 것은 없다. 게임하는 것이 즐겁고 재미있어야 하는데, 경기에 나서는 것이 떨리고 공포를 느낄 정도였다.”
백전노장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뜻밖이었다. 그렇지만 농담 삼아 하는 말이었을지라도 그 행간에 숨어있는 뜻은 가늠해 볼 수 있겠다. 고통을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는 승부 세계는 바깥사람들로선 짐작하기 힘들다.
한화 선수단의 부진은 김응룡 감독의 마지막 지도자 생활의 ‘실험과 시험’이 결국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 김 감독은 구태여 그 까닭을 주저리주저리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짐작할 수 있는 몇 마디는 있었다.
“한화 구단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왔다.”는 그의 말에서 류현진의 공백을 메우기에는 선수 파악과 장악, 그리고 기용과 육성이 그리 순탄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2년은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항간에선 김응룡 감독이 2+1(옵션) 계약을 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래서 한화 선수들이 올해 후반기에 보여준 선전을 두고 ‘김 감독이 1년 더 지휘봉을 잡아 4강 도약의 틀을 다져놓고 물러나는 게 어떨까’하는 바람도 있었다. 그에 대해 김응룡 감독은 “그 무슨, 그런 일 없었다”는 말로 말문을 막았다.
한화의 침체는 마운드 부실, 에이스 투수의 부재로 귀착된다. 류현진이 떠난 뒤 에이스 투수의 부재는 툭하면 연패로 나타났고, 어렵사리 지난해는 송창현, 올해는 이태양이라는 선수를 발굴, 활용하는 바람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 외국인 선수와 FA로 데려온 정근우는 그런대로 제 구실을 했지만 이용규는 부상 여파로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다. 큰 기대를 걸었던 유창식은 여전히 ‘기대주’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선수단 구성의 불균형을 안고 싸우는 데는 어차피 한계가 있었던 터였다.
“(대전에선) 밖에 나다닐 수 없었다. 성격 급한 나와 시비가 생길 수도 있어 아예 숙소에 틀어박혀 라면이나 찌개로 끼니를 때웠다”는 말에서 그의 고충이 흠씬 묻어났다. 자칫 사람들과 마주치면 불필요한 시비가 일 것을 저어했던 것이다.
김응룡 감독은 자기 포장이나 화장술에 아주 서툰 지도자이다. 그가 단 한 번도 스스로 나서서 무엇을 하겠노라고 자기선전을 한 것을 본 적이 없다. 구단들이 필요에 의해서, 그가 해태에서 엄청난 성취를 했을 때는 아닌 말로 ‘러브콜’이 빗발쳤다. ‘우승 청부사.’ 그 게 그의 별명처럼 들릴 때였다.
그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삼성 감독으로 가게 된 일화는 유명하다.
“1999년 시즌이 끝날 무렵 해태 박건배 구단주와 정기주 사장이 그 동안 해태에서 고생했으니 형편이 좋은 삼성 구단으로 가는 게 어떻겠느냐는 권유를 했다. 알고 보니 이미 양 구단이 다 의견 조율을 마친 뒤였다. 그래서 당시 삼성구단 이종기 구단주 대행을 만나 약속을 하고 왔는데, 그 소문이 나자 광주 여론이 들끓었다. 선수도 팔아 먹고, 이젠 감독도 팔아먹느냐는. 기자회견을 통한 발표만 남겨둔 채 그래도 박건배 구단주한테 인사는 드리고 가는 게 도리일 것 같아서 찾아갔더니 그만 덜컥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1년만 더 하고 가라는 얘기였다. 정기주 사장한테 난 모르니 구단이 알아서 처리하시라고 한 뒤 산으로 가버렸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의리였다. 인정에 약한 그가 택한 일은 늘 그랬다. 될성부른 선수들을 자신의 숙소에 데려놓고 기식을 함께하며 ‘선수 만들기’에도 온 신경을 기울여왔던 그였다. 그의 밝은 눈으로 ‘온전한 선수’가 됐던 선수도 많다. 그렇지만 이젠 뒤가 허전하다.
“집에 야구관련 기념품이 하나도 없다. 그나마 남아 있던 훈장 3개는 KBO 야구박물관 추진위원회에 보냈다.”
모든 걸 털고 일어서는 노 지도자의 뒤에 서편으로 기울어 가는 오후 햇살의 그림자가 길게 끌린다.
1983년 해태 타이거즈 감독으로 시작, 2000년까지 무려 18년간 열악한 해태 구단을 9차례나 한국시리즈 정상으로 이끌었고, 2001년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한 이듬해인 2002년 삼성 구단에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안겨줬던 그였다. 2004년 퇴임 이후 6년간 야구인으로 사상 처음으로 구단 사장을 맡아 제자인 선동렬 감독의 2005, 2006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뒷바라지했던 김응룡. 한화 구단에서의 그의 마지막 실험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한국 프로야구판에 새로운 각성의 계기가 될 수도 있는 교훈으로 남아야 할 것이다.
그가 남긴 업적은 한국야구사에 길이 남을, ‘영원히 빛날 훈장’이다.
홍윤표 선임기자
O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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