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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여섯 번째] 영원한 신인왕, 김건우

--김은식 야구

by econo0706 2023. 4. 30.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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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03. 02 

 

1997년 잠실 운동장에는 가끔, 이미 승패가 결정된 순간에 등판해 신통치 않은 공을 던지며 아웃카운트보다도 많은 안타와 사사구를 허용하는 30대 중반의 투수 이름을 연호하는 기이한 군중들이 나타났다.

@BRI@이들은 특별히 그를 응원하기 위해 작정하고 찾은 것도 아니다. 이미 승패가 결정 난 탓에 실없는 농담이나 뱉으며 나갈 채비를 하다 장내방송에서 투수 이름이 흘러나오면 흠칫 놀라 마운드로 나오는 이의 얼굴을 살피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모으고 '파이팅'을 외치는 것이다.

김건우. 1986년 신인왕. 아니 80년대 초반 프로 개막 이전 고교야구 전성기의 전설적인 스타. 그러나 이미 지난 93년 은퇴를 하고 사라져갔던 그 이름이 바로 그 투수의 것이었다.

연호가 시작되면 관중들 사이에는 미묘한 선이 그어졌다.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한 이들이 있었고, 연호의 목소리에 동참하는 상대방을 돌아보며 '야구 좀 아는 사람'이라는 공감의 눈빛을 나누는 이들이 있었다. 김건우를 모르는 이들과 김건우를 아는 이들.

"김건우, 김건우"

그 연호하는 소리가 닿으면 마운드 위에 선 투수는 쑥스러운 듯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고, 그 정수리에 휑하니 비어있는 머리털자리만큼 응원부대의 목소리에도 물기가 번져가곤 했다.

 

▲  선린상고 시절의 김건우 선수 / ⓒ 선린상고 총동창회 홈페이지


고교야구 전성기의 전설적인 스타

1980년. 프로 스포츠가 출범하기 직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스포츠는 단연 고교야구였다. 그리고 그 해 초반 고교야구 최강자로 꼽힌 학교는 선동열의 광주일고와 이상군의 천안북일고였다.

그러나 정작 그 해 가장 빛났던 것은, 황금사자기에서 이상군과의 역사적인 투수전 끝에 결승에 올라선 광주일고의 선동열을 투런 홈런을 포함한 3안타로 두들기며 넉아웃시킨 동시에 마운드에서는 4.2이닝동안 삼진 8개를 뽑아냈던 천재 박노준 그리고 그 해 이영민 타격상의 주인이었던 김건우라는 '2학년생 쌍두마차'가 이끈 선린상고였다.

그것은 숱하게 뜨고 졌던 또 하나 명문고교팀의 출현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수한 여학생들이 선린상고 담장 안으로 편지를 적은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야구장으로 달려가 거칠었던 객석을 여린 환호성으로 들뜨게 했던 문화현상이었다.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서울 팀 선수들다운 깔끔한 용모에 간결한 팀컬러로 통쾌한 하극상의 드라마를 연출하는 그들은 사상 유례가 없는 인기를 한 몸에 모으며 고교야구의 마지막 절정기를 장식했던 것이다.

정작 그 둘이 3학년에 올라서 전국대회를 완벽히 평정하리라고 생각했던 81년에는, 잇단 불운에 단 한 개의 우승컵도 가져갈 수 없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뒤집어써야 했던 '무관의 제왕'이라는 비장한 별명과 황금사자기 결승전 홈 슬라이딩 때 발목이 부러진 채 병실에 누워있던 박노준의 모습은 이십년이 넘도록 그 시절 여고생 팬들의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는 불도장 같은 것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물론 선린상고 신화의 핵심에는 박노준이 있었다. 어쩌면 김건우는 박노준의 조력자로서, 혹은 항상 한 걸음 뒤를 지켜 달리며 그 빛을 가리지 않는 조연급 경쟁자로서 환영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선린상고를 이끈 쌍두마차 박노준과 김건우

▲  김건우 (현 KBO 육성위원) / ⓒ 한양대학교

 

그러나 박노준이 가장 밝게 불타올랐던 그 순간부터 시작된 것이 김건우의 신화였다. 그 한 조짐으로 1981년, 2학년 때까지 타자에만 전념했던 김건우는 투수훈련을 처음 시작하던 그 해 미국 뉴워크에서 열린 제1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베네수엘라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는 '사고'를 치고 만다. 그 대회 한국 우승에 선동열 다음 가는 공로를 세운 것이 바로 김건우였던 것이다.

물론 팀에서는 박노준의 체력을 아끼기 위해 선발로 등판해 앞설 때까지 버티는 '바람잡이투수' 역할에 가깝던 그 해, 나이가 한 살 많던 박노준이 출전하지 못한 '청소년 대회'였기에 큰 의미를 두지 못한 사건이었다.

그 후 대학에 진학한 김건우는 다시 타자로 돌아갔고, 투수는 잠깐의 외도로 기억에 남는 듯했다. 한양대를 졸업한 1986년 박노준에 밀려 서울 2순위로 MBC 청룡에 입단했을 때도 김건우의 역할은 타자였다.

그 해 MBC청룡의 마운드는 탄탄했다. 김용수가 2년차를 맞아 마무리로 전환했고, 선발진에는 원년 이래의 에이스 하기룡을 중심으로 정삼흠, 김태원, 오영일 같은 젊은 유망주들이 즐비했다. 굳이 아마추어를 대표하던 강타자 김건우가 익숙지도 않은 마운드를 욕심낼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당시 투수 운용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일본인 코치 미즈다니는 동계훈련 중 캐치볼을 하던 김건우에게서 범상치 않은 면모를 발견해냈고 그의 진언대로 김동엽 감독은 김건우에게 투수훈련을 지시했다.

그 해 3월 30일 롯데전에서 2이닝을 던지며 실전훈련을 마친 그는 4월 3일 청보 핀토스와의 경기에 선발투입되었고, 실질적인 투수 데뷔전이던 그 경기에서 1안타 완봉승을 거두는 경악스러운 '사고'를 재현해내고 만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4월 한 달 간 또 한 번의 완봉승과 완투승을 곁들이며 5승을 내달렸고, 그 기세로 그 해 기록한 성적이 18승 6패였다. 평균자책점은 1.81.

지난 해 류현진이 미처 넘어서지 못하고 똑같은 숫자에서 멈춰서야 했던 데뷔 첫 해 최다승 기록이다. (데뷔 후 5년 이내 30이닝 이하의 투구수를 기록한 투수에게 주어지는 '신인'으로서는 박정현의 19승이 최다기록이다) 그러나 지난 해 치러진 126경기보다 18경기나 적었던 108경기에서, 류현진보다 30이닝 가까이 많은 229.1이닝을 던져 만든 기록이었다.

고교시절에 이미 140km/h대 중반의 빠른 공을 던진 그의 공은, 특히 구속에 비해서도 묵직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장타를 좀체 허용하지 않았고, 내야로 굴린 타구는 김재박과 김인식의 내야진이 깔끔하게 처리해주었다.

타자로 들어와 투수로... 데뷔 첫 해 평균자책점 1.81

그 해 기대를 모은 하기룡, 김태원, 정삼흠이 모두 무너진 청룡의 마운드에서 18승 선발투수 김건우와 35세이브 포인트의 구원투수 김용수는 그대로 등뼈를 이루는 것이었고, 그나마 팀이 중위권에서 버틸 수 있었던 분명한 이유였다.

이듬해인 87년에도 그는 팀의 기둥이었다. 9월까지 2점대 평균자책점에 12승. '반짝 활약'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했을 뿐 아니라 '2년차 징크스'마저 비웃는 꾸준한 활약이었다. 더구나 선동열과 맞서서도 전혀 밀리지 않는 뚝심 있는 투구에 청룡 팬들은 환호했다. 삼성의 김시진, 롯데의 최동원, 해태의 선동열과 같은 무적의 에이스를 가지게 되었다고 흐뭇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  '읽으면 시속 140km를 던질 수 있는 책'이라는 소문이 난 <김건우의 투수훈련법>. 절판되었지만 여전히 사회야구인들이 복사해서 나누어 보는 야구훈련의 '바이블'로 통한다. / ⓒ 무당미디어

 

그러나 감상적인 여고생들이 만들어낸 호들갑일 뿐이라고 여긴 '비운'이라는 딱지가 엄청난 인생의 벽이 되어 재현될 줄은 그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그 해 9월 12일, 건널목을 건너던 그를 트럭이 덮쳤고, 그의 두 팔과 한 다리는 조각조각 부서지고 찢어지는 참담한 사고를 당하고 만다.

꺾인 뼈는 다시 붙었지만, 두 해의 공백은 이미 어깨와 팔다리 곳곳의 근육을 흐트려놓았다. 89년 마운드에 복귀해 이를 악물고 공을 던졌지만, 이미 사고 전에 비해 10km/h는 떨어진 구속에 무뎌진 변화각은 어쩔 수 없었다. 그 해부터 91년까지 기록한 승수가 합쳐서 6승. 이미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청룡의 팬들이 생겨나던 시점이었다.

91년에 김건우는 다시 타석에 섰다. 몇 해 동안이나 놓은 방망이가 어색했지만 몇 번의 스윙만으로도 감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 해 7월쯤에는 최다안타 경쟁을 벌이며 팀의 4번으로 올라서기도 했다. 그러나 한 번 시작된 불운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땅볼을 굴려놓고 지나치게 열심히 달려온 상대팀 타자 장종훈은 김건우가 지키고 있던 1루 위로 들이닥쳤고, 글러브를 낀 김건우의 손목은 다시 한 번 부러지고 말았다.

건널목 건너던 그를 트럭이 덮치고...

그리고 93년 김건우는 야구장을 떠났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그에게 즐거움과 행운을 안겨주었던 야구장은 지긋지긋한 부상과 불운으로 가득했다. 더 이상 그 안에서 버틸 힘이 없었다.

이후 그는 2군 투수코치로 후배들을 돌보며 야구를 관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야구장 뒤꼍에서 그는 또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날마다 크고 작은 부상을 끌어안고 미련하게 뒹구는 후배들을 돌보며 자신의 몸이 달리 보였던 것이다. 왜 저렇게 미련하게 참고 버텨왔던 것일까. 왜 좀 더 현명하게 몸을 추스르지 못했던 것일까.

그는 후배들을 돌보며 연구한 재활법을 자신의 몸에 실험했고, 그러다보니 은퇴한 지 서너 해가 지난 어깨로 오히려 더 싱싱해진 공을 뿌릴 수 있게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복귀했다. 1997년이었다.

"이기지 못해도 좋습니다. 이기고 지는 걸 떠나서 그저 마운드에 서는 게, 얼마나 행복한 건지… 예전에는 몰랐었습니다."

그 시절 뒤늦게 복귀한 이유를 묻는 어느 기자에게 그가 했던 이야기였다. 그 해, 그의 말대로 그는 단 한 개의 승리나 패전 혹은 세이브를 기록하지 못했다. 대개는 승패, 아니 패배가 뚜렷해진 경기를 중심으로 11.2이닝에 나서 6개의 자책점, 11개의 안타와 4개의 사사구를 기록했다. 초라했지만 그를 기억하는 팬들을 환호하게 했던 그의 마지막 해 성적이었다.

'왜 저렇게 미련하게 참고 버텨왔던 것일까'

그 해 8월 27일. 레이더스와의 원정경기에서 일찌감치 0-5로 점수차가 벌어지자 천보성 감독은 김건우를 마운드로 불러냈다. 그리고 그와 맞선 네 번째 타자는 바로 박노준. 이미 대학시절을 거쳐 프로에 와서도 투수와 타자 양쪽으로 혹사당하며 천재성을 거세당한 비운의 동반자.

그러나 7번의 수술로 부러지고 끊어진 뼈와 인대를 잇는, 김건우 못지않은 투지와 도전으로 타선의 한 축을 담당하며 레이더스 돌풍을 이끌었던 영원한 라이벌 박노준 역시 그 해 부상 후유증으로 벤치를 지키며 은퇴식 날짜를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건우, 김건우'
'박노준, 박노준'

작지만 힘찬 연호 소리가 양쪽에서 터져 나와, 섞이고, 나뉘고, 결국에는 합쳐지던 그 순간. 타석에 선 왕년의 천재투수 박노준의 스윙이 마운드에 선 왕년의 천재타자 김건우의 3구를 때려냈고, 높이 공중으로 치솟던 공은 중견수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갔다.

그렇게 짧은 마지막 승부는 끝이 났고, 김건우는 말없이 모자를 한 번 벗었다가 다시 눌러썼다. 그리고 괜히 콧등이 시큰해진 관중석의 '아저씨'들은 먼 산을 보며 담뱃불을 붙여 물었다.

그렇게 세월은 가고, 그렇게 기억은 남는다. 치열함으로 달구어져 처절하게 새겨진, 이제는 기억 속에서마저 흑백으로 떠오르는 그 화려했던 영상.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늘에서조차 부끄럽지 않게 분투해주었던, 그래서 나 역시 부끄럼 없이 눈물 흘리며 가슴 시리게 기억할 세월을 선사해준 영웅들이여, 고맙다.

 

김은식(punctum)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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