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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靈魂의 母音] 흙과 평면공간(平面空間)

山中書信

by econo0706 2007. 2. 11.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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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이 말은 근대화에서 소외된 촌락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입에 담을 수 있는 오늘의 속담이다.
 
우리 동네에서 뚝섬으로 가는 나루터까지의 길도 그러한 유형(類型)에 속하는 이른바 개발도상의 길이다.
 
이 길은 몇해 전만 해도 논길과 밭둑길이 있어 사뭇 시골길의 정취가 배어 있었는데, 무슨 지구(地區)개발인가 하는 바람에 산이 깎이고 논밭이 깔아 뭉개지더니 그만 허허벌판이 되고 말았다. 물 빠질 길도 터놓지 않아 비가 오거나 비가 오거나 눈이 녹으면 그야말로 엉망진창인 것이다.
 
그래도 이 길을 다니는 선량한 백성들은 당국에 대한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오고 간다. 가위 양같이 어진 이웃이라 할만하다.
 
이제 이 길에 얼음이 풀리니 장화를 신고도 발을 떼어놓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러한 길에도 감사를 느끼면서 걷기로 했다. 그것은 한동안 잃어버렸던 흙과 평면공간을 이 길에서 되찾았기 때문이다.
 
몇 사람이 합숙을 하면서 해야 할 일이 있어 어느 아파트단지에 들어가 한달 남짓 지냈었다. 같이 일할 사람들이 절에서는 거처가 불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처음에는 생활환경이 바뀌는 데서 오는 약간의 호기심과 아파트의 주거생태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라 싶어 그런대로 지낼만 했다. 생활이 편리해서 우선 시간이 절약되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일에 능률도 안 오르고 무엇인가 퇴화되어 가는 듯한느낌이었다.
 
8층에서 단추만 누르면 삽시간에 지상으로 내려온다. 슬리퍼를 신은 채 스무 걸음쯤 걸어 아케이트에서 필요한 것을 사온다. 그것고 귀찮으면 전화로 불러 가져오게 한다. 물론 연탄불을 갈 시간 같은 것에 신경을 쓸 필요도 없다.
 
이렇듯 편리하게 사는데도 뭔가 중심이 잡히지 않은 채 겉돌아가는 것 같았다.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 흙탕길을 걸으면서 문득 생각이 피어올랐다. 잘 산다는 것은 결코 편리하게 사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우선 우리는 보행(步行)의 반경(半徑)을 잃은 것이었다. 그러고 차단된 시야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몸의 동작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활발한 사고작용도 따른다. 툭 트인 시야는 무한을 느끼게 한다.
 
그곳에는 수작공간(垂直空間)은 있어도 평면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이웃과도 온전히 단절되어 있었다.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 속의 지면(知面)들도 서로가 맹송맹송한 타인들. 그리고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흙이다. 그렇다, 인간의 영원한 고향 같은 그 흙이 없기 때문에, 당당하게 직립보행(直立步行)할 대지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늘 추상적으로 살았던 것이다. 마치 온실 속의 식물처럼.
 
흙과 평면공간, 이것을 등지고 인간이 어떻게 잘 살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현대문명의 권속(眷屬)들은 그저 편리한 쪽으로만 치닫고 있다. 그 결과 평면과 흙을 잃어간다. 불편을 극복해 가면서 사는 데에 건강이 있고 생의 묘미가 있다는 상식에서조차 멀어져가는 것이다.
 
불편하게는 살 수 있어도 흙과 평면공간없이는 정말 못 살겠던데.
 

1972년 3월 6일
 
法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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