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사이에 뜰에는 초록빛 물감이 수런수런 번지기 시작했다.
지난 해 가을 이래 자취를 감추었던 빛깔이 다시 번지고 있다. 마른 땅에서 새 움이 트는 걸 보면 정말 신기하기만 하다. 없는 덧이 자가취를 거두었다가 어느새 제 철을 알아보고 물감을 푸는 것이다.
어제는 건너마을 양계장에서 계분(鷄糞)을 사다가 우리 다래헌(多來軒) 둘레의 화목(花木)에 묻어주었다. 역겨운 거름냄새가 뿌리를 거쳐 줄기와 꽃망울에 이르면 달디단 5월의 향기로 변할 것이다. 대지의 조화(造化)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새봄의 흙냄새를 맡으면 생명의 환희 같은 것이 가슴 가득 부풀어 오른다. 맨발로 밟는 밭흙의 촉감, 그것은 푸근한 모성(母性)이다.
거름을 묻으려고 흙을 파다가 문득 살아 남은 자임을 의식한다. 나는 아직 묻히지 않고 살아 남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겨울 춘천을 다녀오면서도 그런 걸 느꼈었다. 그때 어쩌다 맨 뒷자리 비상구(非常口)쪽이 배당받은 내 자리였다. 그 동네도 초만원인 망우리 묘지 앞을 지나오면서 문득, 나는 아직도 살아남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굳이 비상창구를 통해서 본 묘지가 아니더라도 지금 생존하고 있는 모든 이웃들은 실로 '살아 남은 자들'임에 틀림없다. 눈 한번 잘못 팔다가는 달리는 차바퀴에 남은 목숨을 바쳐야 하는 우리 처지이다.
방 임자도 몰라보는 저 비정한 연탄의 독기(毒氣)와 장판지 한장을 사이해서 공존(共存)하고 있는 일상의 우리가 아닌가. 그 이름도 많은 질병, 대량 학살의 전쟁, 뜻밖의 재난, 그리고 자기자신과의 갈등. 이런 틈바구니에서 우리들은 정말 용하게도 죽지 않고 살아 남은 자들이다.
죽음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영원한 이별이기에 앞서, 단 하나뿐인 목숨을 여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생명은 그 자체가 존귀한 목적인 것이다. 따라서 생명을 수단으로 다룰 때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악이다. 그 어떠한 대외명분에서일지라도 전쟁이 용서 못할 악인 것은 하나뿐인 목숨을 서로가 아무런 가책도 없이 마구 죽이고 있기 때문다.
살아 남은 사람들끼리는 더욱 아끼고 보살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잡아 먹지 못해 으르렁거리고 있으니 어떻게 된 노릇인가. 언제 어디서 자기 차례를 맞이할지 모를 인생이 아닌가. 살아 남은 자인 우리는 채 못살고 가버린 이웃들의 몫까지도 대신 살아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현존재(現存在)가 남은 자로서의 구실을 하고 있느냐가 항시 되살펴보이야 한다는 말이다.
그날 일을 마치고 저마다 지붕 밑의 온도를 찾아 돌아가는 밤의 귀로에서 사람들의 피곤한 눈에 마주친다. "오늘 하루도 우리들은 용하게 살아 남았군요"하고 인사를 나누고 싶다. 살아 남은 자가 영하의 추위에도 죽지 않고 살아 남은 화목(花木)에 거름을 묻어준다. 우리는 모두가 똑같이 살아 남은 자들이다.
1972년 4월 3일
法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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