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01. 25
"언제 한숨이 제일 많이 나오느냐…. 초반에 작살날 때지."
프로야구 감독 가운데 한 분이 감독의 어려움에 대해 말할 때였다. 믿고 선발로 마운드에 올린 투수가 초반부터 난타당할 때 감독들은 곤혹스럽다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 승부는 이미 물 건너갔는데' '선수들도 그걸 이미 알고 풀이 죽었는데 9회까지 어떻게 버티나'. 뭐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난감하다고. 그래서 '티 안 나게' 다음 경기를 대비하는 것도 연륜이고 기술이라고 말이다.
감독들이 이렇게 어려워하는 부분, 그러니까 '어떻게 이기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지느냐'는 왜 중요한가. 그 지는 시간이 중요해서다. 지는 시간도 경기시간이고, 경기시간은 관중, 즉 소비자와 약속된 시간이다. 그 모든 시간이 프로야구의 콘텐트다. 이기는 순간의 환희와 짜릿함뿐만이 아니라 지는 순간의 과정도 프로야구의 품질을 결정해 주는 요소다. 프로야구에서 어떻게 지느냐의 품질을 보완해 주는 건 개인기록이다. 선수들은 이기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지만 그 승패가 결정됐을 때, 개인기록이라는 또 하나의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보완장치가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그 보완장치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선수 스스로 질 때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철학과 소신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 서울대 강준호교수의 말이다. "프로 스포츠 콘텐트의 생산자라고 할 수 있는 선수들은 승패(결과)에 집착하지만 구단, 중계방송사, 스폰서, 관중 등 소비자에게는 그 과정이 결과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기기 위해 서로 싸운다거나, 시간을 끄는 등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면 그 경기의 수준과 질이 떨어지고, 그것은 곧 가치의 저하를 불러온다. 그러나 지더라도 최선을 다해 감동을 주면 그 가치는 높아진다."
백번 옳은 말이다. 프로야구의 품질은 선수들에 의해서 결정되며 소비자가 음미하는 '품질의 좋고 나쁨'은 곧 그 산업의 가치가 된다. 초반에 경기의 흐름이 기울어 감독들이 곤혹스러워하는 그 순간에도 선수들은 최선을 다해 열정 있고, 수준 있는 플레이를 보여줘야 그 산업의 가치가 높아질 수 있다. 그래서 지는 과정, 어떻게 지느냐가 중요하다.
모두가 프로야구는 순위경쟁의 차원을 떠나 스포츠 산업으로서, 문화의 콘텐트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결과로는 우승이라는 목표를 얻기 위해 노력하지만 과정(경기)을 통해서는 승패보다 수준 높은 플레이와 좋은 품질의 팬 서비스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의식도 있다. 그래야 프로야구가 가치 있는 산업으로서 자리 잡고 국민이 진정 즐길 수 있는 문화의 한 콘텐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는 프로야구 경기장에서 '포기하는 경기'를 쫓아내고 '승리 지상주의'를 반드시 몰아내자. 그래야 양질의 콘텐트가 만들어지고, 나아가 산업.문화를 논할 수 있다.
이태일 / 야구전문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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