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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농구] ⑦ 브라질을 위협한 한국농구, 1970년 토리노 유니버시아드 대회

--유희형 농구

by econo0706 2022. 11. 11.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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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05. 08.

 

전 세계 대학생들의 축제인 1970년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가 8월 26일부터 9월 6일까지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개최되었다. 이전 대회는 1967년 일본 도쿄에서 열렸다. 우리나라 농구는 여자 1위, 남자 2위의 최고 성적을 거두었다. 그래서인지 토리노 하계 U대회에 구기 종목으로는 유일하게 남자농구만 참가했다. 대한민국은 테니스, 농구 등 27명의 선수로 구성되었다. 최정예 선수단이 출전한 한국은 테니스에서 동메달 한 개를 획득하는 데 그쳤다.

우리나라는 58개 참가국 중 21위를 했다. 소련(금 26개), 미국(금 22개), 동독(금 8개)이 1~3위를 차지했다. 남자농구 대표팀은 감독에 연세대 양흥식, 코치에 기업은행 신봉호씨가 맡았다. 선수는 늦게 합류한 신동파를 비롯하여 유희형, 이자영, 차성환, 강호석, 이광준, 황재환, 김길호, 이동양, 최경덕, 김동원, 이희택으로 구성되었다.

대한항공이 없던 시절, 유럽 비행기를 타고 토리노로 향했다. 보잉 707로 110석인데 빈자리가 없었다. 좌석이 좁았다. 신장이 큰 농구선수들은 고역이었다. 7시간을 부동자세로 앉아 있어야 했다. 알래스카 앵커리지에서 급유를 위해 두 시간 동안 공항 대합실에서 보내야 했다. 북극을 넘어 유럽을 향해 날았다.

야간대학 재학 중 U대회 대표로 발탁

가슴 아픈 일도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갑자기 뒷좌석에서 여러 명의 갓난아기가 울어대기 시작했다. 사정을 알고 난 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생후 2~3개월 밖에 되지 않는 한국의 입양아 18명이 바구니에 담겨 뒷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기를 돌보는 사람은 젊은 남녀 3명이었다. 1인당 6명의 입양아를 암스테르담에 도착할 때까지 돌봐야 하는 일을 맡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유럽에서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인데, 편도 항공료를 지원받는 조건으로 그 어려운 일에 자원한 것이다.

 

유아 돌보는 경험과 지식이 없는 그들은 입양기관에서 간단한 교육을 받고, 각자 6명의 아기를 책임진 것이다. 울고 보채는 아기를 달래느라 땀과 눈물이 범벅되어 발만 동동 구르는 그들이 안쓰럽고 애처로웠다. 아기를 돌보는데, 얼마나 힘이 들까 생각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기들은 울다 지쳤는지 북극 횡단할 때는 조용히 잠을 자고 있었다. 돌봄 유학생들이 모처럼 쉬는 모습을 보며 꼭 성공하기를 마음으로 빌었다.

 

현재 중년(50세)이 넘었을 그 때의 입양아들, 유럽 각 나라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지? 궁금하지만, 고국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 후진국의 비애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했다. 힘든 여정 끝에 토리노에 도착했다.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공업 도시인 토리노는 피아트 자동차 공장과 본사가 있는 곳이다. 도심 변두리에 있는 조그마한 대학 캠퍼스가 숙소였다. 그 대학의 기숙사인데 우리나라 여관만도 못했다. 유니버시아드 대회는 대학생들의 잔치라서 인기가 없다. 대회 준비도 소홀하다. 일부 대학생들은 자비를 들여 대회에 참가한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항상 국가대표급 선수단을 파견했다. 1967년 도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우리나라 여자농구가 일등을 했다. 대부분 대학생이 아니었다. 박신자를 비롯한 쟁쟁한 국가대표선수들을 출전시켰다. 국가가 정책적으로 대학생 대회에 파견한 것이다. 당시 대학에 여자 운동부가 거의 없었다. 남자선수는 대부분 대학에 진학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나는 단국대 2학년이었다. 야간대학이었다. 그 당시에는 직장 퇴근 후 저녁에 강의를 들을 수 있는 대학교가 많았다.

브라질 전 우리 득점은 깎고 상대 득점 계산 

이탈리아로 출국하기 일주일 전, 언론에서 남자농구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대학생 선수만으로는 전력이 약하다는 것이다. 농구협회가 부랴부랴 수습책을 내놓았다. 실업 선수인 당시 최고의 스타 신동파 선수를 포함시켰다. 그 대신 연세대 재학 중인 M선수를 제외했다. 해외에 나갈 기회가 거의 없던 시절, 탈락한 당사자는 얼마나 실망이 컸겠는가? 토리노 대회 성적은 괜찮았다. 신동파와 호흡을 맞추며 경기를 주도했다.

 

나는 어이없게 편도선 염증이 생겨 매일 주사를 맞으며 뛰었다. 예선 3위를 했다. 유럽국가와 남미 브라질 등과 대전했다. 농구는 높이 싸움이다. 신장이 커야 유리하다. 우리나라 최장신이 188cm인데 상대국은 2m 이상 선수가 5, 6명씩 되었다. 브라질과 경기에서는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겪었다. 후반전 우리나라가 2점을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득점했는데, 전광판에 브라질 득점으로 계산된 것이다. 벤치에서 강하게 항의해도 소용없었다. 더 황당한 것은 우리 팀 점수에서 2점을 깎아내린 사실이다.

결국, 브라질에 1점 차로 패했다. 6점을 손해 본 경기인데 항의해도 소용없었고, 시정되지 않았다. 동네 농구만도 못한 경기 운영에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었다. 숙소와 식사 환경도 최악이었다. 모든 것이 협소하고 부대시설이 거의 없었다. 식사가 문제였다. 자원봉사자들이 영어를 못하기 때문에 이탈리아어를 해야 한다. 밥-리조(riso), 빵-빠네(pane), 물-아콰(acqua)를 외쳐야 겨우 얻어먹을 수가 있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우리나라는 테니스에서 동메달 한 개를 획득했다. 귀국길에 프랑스 파리에서 1박을 했다. 가장 힘든 것은 소통이었다.

 

영어가 전혀 통하질 않아 식당에서 음식 메뉴 고르기가 무척 어려웠다. 메뉴판이 모두 불어로 되어있어 알 수가 없었다. 맥주(Beer)만 알아볼 수 있었다. 맥주로 허기를 채울 수는 없었다. 요령이 생겼다. 식당에 들어가면서 눈을 굴려 주변을 살폈다. 손님들이 먹는 음식을 눈여겨보고 같은 것을 주문했다. 멋모르고 술집에 들어갔다가 낭패를 당할 뻔하기도 했다. 무희들이 춤추는 곳인데 앉자마자 샴페인 덮개를 따려고 해 황급히 저지하고 뛰쳐나왔다. 뚜껑을 열면 200불이 넘는 바가지를 쓴다는 것이다. 당시 내 월급이 50불 정도였다. 다른 종목 선수가 당했다는 말을 나중에 듣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목적지는 스위스 샤모니, 3,400m 몽블랑 정상을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보았다. 눈으로 뒤덮인 몽블랑은 산악인과 스키어들이 꼭 한번 가보고 싶은 장소다. 51년 전에 알프스의 유명한 만년설을 직접 만져본 추억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귀국하자마자 11월에 열리는 태국 방콕아시안게임 대비 훈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1970년은 바쁜 한해였다. 커다란 국제대회가 3개나 있었다. 대회 장소도 가보기 힘든 유럽이 두 번 있었다. 작은 비행기를 타고 알래스카를 거쳐 북극을 횡단해야 유럽을 갈 수 있었다. 당시 여권은 일회용이었다. 3차례나 여권 수속에 매달려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상상하기 힘든 꿈같은 이야기이다. 연간 천만 명이 해외여행을 하는 현실에 비추어 보면 그저 감탄할 뿐이다. 부강한 나라에 사는 것에 감사드린다.

 

유희형 / 전 KBL 심판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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