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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농구] ⑤ 1969년 ABC 대회 한국남자농구 사상 첫 드림팀 탄생

--유희형 농구

by econo0706 2022. 11. 10.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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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04. 06. 

 

1969년 11월 중순, 대한민국 남자농구 대표팀은 태국 방콕으로 향했다. 제5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ABC대회)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겨울이 오지 않았는데도 날은 제법 차가웠다. 하지만 누구도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모두 가슴속에 뜨거운 불덩어리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간직한 뜨거운 불덩어리는 대한민국 최초의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 우승 욕망이었다.

 

1960년에 창설된 ABC대회에서 한국은 필리핀, 일본에 밀려 정상에 다가서지 못했다. 첫 우승을 노리고 1967년 제4회 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그 대회에서 마저 연승을 달리다가 필리핀에게 80-83으로 패해 준우승에 그쳤다. 다시 정상 도전에 나선 우리들의 가슴을 채운건 단순한 우승 욕망이 아니라 자신감이었다. 우리는 충분히 자격이 있었다.

 

2년간 다진 조직력으로 아시아무대 정복 준비

우리는 정말 피나는 훈련을 반복하며 최고 수준의 개인기를 갖추었다. 눈 감고도 패스를 주고받고 골을 넣을 수 있을 정도였다. 공을 잡을 때부터 골을 넣을 때까지 과정이 완벽했다. 그야말로 ‘척하면 척’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우리나라 최초의 드림팀이었다. 머리가 매우 좋아 순간 적응력이 뛰어나고 허슬플레이가 남달랐던 김영일, 포인트가드의 원조인 김인건, 드리블과 돌파의 귀재인 이인표, 던지면 골을 만드는 슛 기계 신동파, 그리고 러닝 가드인 내가 베스트5였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 전부터이니 벌써 2년여 동안 한솥밥을 먹으며 우승할 날을 기다려왔다.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난 故 김영일 선배는 천재였다. 경기고를 시험을 쳐서 입학한 그는 연세대 정치학과도 운동이 아니라 공부로 들어갔다. 그리고 대학에서 농구 선수 생활을 시작해서 국가대표로 뽑혔다. 농구는 고교시절 취미였고 정작 경기에 나선 종목은 수영이나 스케이팅, 아이스하키였다. 늦게 배운 만큼 슛이나 공격력이다소 부족했지만, 상황 파악을 하고 수비 저지선을 만드는 데는 추종을 불허했다. 상대 선수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훤히 꿰뚫고 있던 그는 상대가 갈 길에 한발 먼저가 있었다.

 

신동파는 슛에 관해선 대적할 상대가 없었다. 수비를 조금 게을리 했지만 잡으면 던지고 던지면 들어갔기에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수비를 보다 적극적으로 했다면 골 결정력이 떨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우리는 당시 훈련의 마지막을 슛으로 마무리했다. 2인 1조가 되어 패스를 받아 슛하는 것으로 다섯 군데에서 각각 10개씩 총 100개의 슈팅을 한 뒤 결과를 정확하게 기록했다. 선수 전원의 성공 개수가 80개에서 85개 정도였으나 신동파, 김인건은 90개 가까이 넣었다. 신동파는 자유투를 연속 91개를 넣은 적도 있었다. 나도 슛 성공률이 괜찮은 편으로 85~86개를 기록했다. 

▲ 새로 지휘봉을 잡은 김영기 감독(오른쪽)은 효율적인 훈련 방식을 택해 팀 전력을 향상시켰다

 

김영기 감독 부임에 신바람난 대표팀

처음 대표팀이 구성되었을 때 코칭스태프는 감독에 이상훈, 코치에 김영기였다. 우리는 다소 실망했다. 이상훈감독은 지도자로 훌륭했지만, 훈련 방식이 혹독했다. 농구장 왕복달리기 30분을 한 다음 연습을 시작했고, 3시간이고 4시간이고 계속 같은 훈련을 시켰다. 체육관이없던 시절 먼지 구덩이인 실외 농구장에서 50바퀴 100바퀴를 돌리던 지도자가 많이 있었다.그러나 일주일쯤 지났을까, 이상훈 감독이 물러났다. 선진 미국농구를 배운 젊은 김영기 코치를 배려한 결정인듯 했다.김영기씨가 감독으로 지휘봉을 잡았다. 보조코치도 없었다. 김영기씨는 불세출의 스타플레이어로 1956년 멜버른올림픽, 1964년 도쿄올림픽에 선수로 참가한 뒤 1966년 은퇴했다가 3년 만에 대표팀 지도자로 돌아온 것이다.

 

김 감독의 지도법은 과연 달랐다. 2시간 이상 할 경우 효율이 떨어진다면서 훈련시간을 압축했다. 2시간 동안 집중력을 높이고 전력투구하도록 하였다. 3~4시간보다 강도는 오히려 강했다. 서로 경쟁하도록 하여 훈련이 지루하 않고 재미있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는 팀 전술 훈련을 통해 우리에게 수비를 강조했고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전략을 구사할 수 있도록 팀을 만들어 갔다. 그 속에서 우리의 실력은 부쩍부쩍 늘어갔다. 강화훈련은 종로의 YMCA호텔에서 시작했다. 같은 건물에 있는 체육관은냉, 난방시설이 잘되어 있어 훈련 효과가 좋았다. 마무리 훈련은 춘천에서 실시했다. 미8군 농구팀과 연습경기도 가졌다. 실전만큼 좋은 훈련은 없었다.

춘천 강화훈련 중 가수 송창식 씨 위문공연

어느 날인가 미군 부대에 들어가려는데 헌병이 나를 불렀다. 미군 부대에 들어가려면 입구에서 간단한 검사를받아야 했다. 그 헌병은 내 눈을 들여다보더니 하프 아메리칸(혼혈아)이냐고 했다. 어이가 없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머리카락 색깔이 약간 노랬다. 그래서 별명이 ‘황두’, ‘황소’ 등으로 불렸지만, 혼혈은 절대 아니었다. 황당했다. 그 후 선배들은 나를 황두(노랑머리)라고 놀려댔다. 춘천에서 합숙 훈련하는 동안 가수 송창식 씨가 위문차 방문했다. ‘트윈폴리오’에서 독립한 직후였다. 서울예고 교장이며 지휘자인 임원식 선생님과 함께였다. 임 선생님은 농구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분이다. 중요한 오케스트라 지휘가 있는 날도 농구장을 찾았다. 농구경기를 보면 지휘가 잘 된다고 하셨다.다방을 통째로 빌려 송창식의 감미로운 노래를 마음껏 들었다. 그는 인천중학교를 나왔고, 농구선수로 뛰기도 했다. 1년 선배다. 내가 속한 송도중학교와 시합도 했다. 제물포고 출신 최종규 씨가 직계선배다. 내방에서 함께 잠을 잔 후 아침 일찍 서울로 떠났다. 그 후 가깝게 지내며 강변가요제에 유명가수들과 동행하기도 했다. 장충체육관에 내 플레이를 보러 온 적도 있다. 중학교 때 농구했다는 말을 듣고 싶었지만, 끝내 하지 않았다.

아시아 최강 필리핀 격파…신동파 혼자 50득점

마침내 1969년 ABC대회가 막을 올렸다. 당시 아시아 농구는 한국, 필리핀, 일본, 대만이 강하고 나머지 팀은 약했다. 중국이 등장하지 않았던 시기였다. 4개국 외에 다른 나라는 전력이 약했다. 김영기 감독께서 경기 전에 선수들을 모아놓고 작전을 지시한다. “오늘 경기는 몇 점차로 승리할 것이다“’라고 예상하는데 거의 적중했다. 풀리그 첫 경기에서 말레이시아를 92-72, 다음 경기에서 홍콩을 112-38로 크게 이겼다. 파키스탄, 인도도 하프 게임이었다. 아시아 4강 중 하나인 대만 역시 94-69로 대파했다. 일본전도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선수들은 일본전을 앞두고 한순간 당황했다.

 

일본과 경기 하는 날 감독이 물었다.

 

“일본은 오늘 어느 나라와 경기하지?”

 

선수들이 놀라 대답했다.

 

“우리하고 붙는데요.”

 

감독은 태연했다.

 

“이길 비책은 구상해 놨어 걱정하지 마! 내가 깜빡했네.”

 

감독 말대로 일본에 여유 있게 승리했다. 75-66이었다.

 

이제 필리핀만 남았다. 일본이 필리핀을 꺾은 터여서 일본전 승리는 우승에 대한 확신을 주었다. 하지만 일본과필리핀의 경기는 1점 차여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필리핀은 당시 아시아 최강으로 군림했다. 아시아선수권대회 3회, 아시안게임 4회 우승국이었다. 1967 서울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도 우리의 발목을 잡았다. 11월 29일, 자신이 있었지만, 마음 놓을 수 없는 마지막 필리핀과 경기.

 

그날도 감독은 11점 차 승리를 예언했다. 초반부터 공격과 수비가 잘 이루어졌다. 포인트 가드 김인건, 나는 러닝 가드로 나서 센터 김영일과 함께 리바운드를 열심히 잡아냈다. 그러나 전반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47-47, 팽팽한 접전이었다. 김영기 감독은 여전히 여유가 있었다. 처음부터 후반에 승부를 걸 계획이었다며 이제 시작하자고 했다. 선수들 역시 동점 상황인데도 주눅 들지 않았다.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알고 있었다.

 

후반이 시작되었다. 공격에서 G2 작전(KBS 드라마 제목.우리가 암호로 정함)으로 효과를 많이 봤다. 외곽 슛 챤스를 만드는 작전인데 수비하기가 어려운 기막힌 전술이었다. 주장 김영일 선수는 묵묵히 수비, 리바운드, 어시스트에 주력하며 팀을 이끌었다. 신동파는 혼자서 50점을 넣었다. 한국이 95-86으로 필리핀을 눌렀다. 3점 슛이 없던 시절 우리가 넣은 95점은 대단한 공격력이었다. 신동파는 필리핀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고, 유명 인사가 되었다.

 

3개월여 기간 힘든 훈련과정을 참고 이겨냈다는 성취감에 눈시울을 적셨다. 드디어 이룬 남자농구의 아시아 제패. 어린 나이였지만 주전선수로 많은 활약을 했다. 약관 20세였다. 필리핀과의 경기는 KBS 라디오를 통해 이광재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생중계되었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이광재 아나운서의 외국 원정경기는 언제나 인기가 있었고 그날도 이광재 아나운서의 라디오 생중계를 많은 국민이 밤잠 설치며 들었고 열렬히 응원을보냈다. 그분의 시원하고 명쾌한 중계 멘트는 현장감이있었고, 청취자를 열광시켰다.

 

라디오 생중계 덕에 유명해졌다. 귀국 후 실감할 수 있었다.경기가 끝난 후 이광재 아나운서가 주전선수들을 중계석으로 불러 올렸다. 여전히 흥분된 목소리로 우리를 맞이한 그는 우리에게 눈물을 유도했다. 그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우리 선수를 만나보겠습니다”라고 했고 우리는 억지로라도 울먹이는 목소리를 내면서 기쁨의 인터뷰를 했다.

 

▲ ABC대회에서 우승한 선수단은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한 뒤 서울시청까지 카퍼레이를 벌였다. 유희형이 오른 차에 이름표가 잘못 붙여졌다.


김포공항-서울시청 카퍼레이드 후 청와대 방문

우승한 후 한국에서 이병희 대한농구협회장이 방콕으로날아와 귀국일정을 지휘했다. 일본 도쿄로 향했다. 공항에 재일교포 정건영씨가 직접 환영을 나왔다. 그분은 일본에서 맨주먹으로 성공한 분이었다. 스포츠를 좋아하는도쿄의 거물이었고, 사업가였다. 우리나라 정계, 재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분이었다.선수단은 그분 자택에 투숙했다. 6층 건물 전체가 사무실 겸 살림집이었다. 그곳에서 난생처음 달팽이 요리를먹었고, 고가의 바바리코트도 선물 받았다. 저녁에는 번화가인 ‘아카사카’에 있는 최고급 클럽 ‘미카도’에서 술도마셨다. 골든 벨이 있는 곳이다. 벨을 울리면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술값을 부담해야 하는 규정이 있다고 했다. 7공자중 한 명이었던 박모 씨가 한국인 최초로 그종을 쳤다는 설이 있다.

 

12월 3일 귀국했다. 환영식이 대단했다. 우리는 군용 지프차에 올라 카퍼레이드를 했다. 당시엔 오픈카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카퍼레이드는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 앞까지 이어졌다. 정말 영광스러웠고 우승하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지만, 카퍼레이드 자체는 너무 힘들었다. 방콕이 더운 나라였기 때문에 우리는 정식 단복으로 여름옷을 입고 있었다. 12월 초 날씨는 영하권이었고 오픈카에서 맞이하는 바람은 정말 ‘얼어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우리는 덜덜 떨며 오픈카를 타고 카퍼레이드를 한 후 청와대를 향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수고했다’라며 우리를 격려했다. 육영수 여사도 함께 했다. 육영수 여사는대통령에게 ‘선수들 옆에 가지 마시라’는 농담을 하며 분위기를 풀었다. 키 차이가 워낙 크게 나서 거인과 소인처럼 보이니 비교되지 않게 하라는 말이었다. 모두 한바탕웃음을 터뜨렸지만, 대통령은 개의치 않았다.그 순간에도 우리의 중요 관심사는 포상금이었다.

 

이병희 회장께서 TV 한 대씩 주기로 약속했기에 플러스알파를 기대했지만, 결과는 순금 3돈짜리 얇은 메달이 전부였다. 기다렸던 현금은 없었다. 실망했지만 나라가 가난한데 어쩌랴! 추위에 떨며 고층건물에서 떨어지는 오색종이 가루를 뒤집어쓰며 손을 흔들던 추억으로 만족해야 했다.

 

▲ 남자농구의 사상 첫 아시아제패는 국가적 경사였다. 대표팀은 귀국 후 청와대를 방문, 박정희 대통령 내외로부터 축하를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김영기 감독(두번째)을 비롯한 선수단과 환담하고 있다


유명세 얻어 TV 오락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나는 대표팀 막내였다. 라디오 생중계 덕에 꽤나 유명해졌다. 덕분에 TV 오락프로에 출연하기도 했다. 변웅전 씨가 진행하는 ‘유쾌한 청백전’과 구봉서, 배삼룡, 이기동 등이 이끌고 있던 코메디 프로 ‘웃으면 복이 와요’ 등이었다. 나는 출연할 때마다 이승만 박사의 성대모사를 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습네다’라는 문장인데 잘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내가 이 박사의 성대모사를 하게 된 것은 변웅전 씨 때문이었다. 그는 언젠가 대사관에서 연 축하연에서 내가 하는 걸 본 후 툭하면 나를 불러냈다. 그가 나를 부른 이유는 내가 스무 살 막내임에도 선배들을 제치고 주전으로 뛸 만큼 농구 잘하는 걸 기특하게 보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대표팀의 멤버는 나를 포함한 김영일, 김인건, 이인표, 신동파의 베스트5와 조승연, 이자영, 서상철, 신현수, 곽현채, 박한, 최종규였다. 나이가 어려 선배들 때문에 경기중에도 가끔 곤혹스러울 때가 있었다. 양쪽 포워드인 신동파와 이인표가 그들로 내가 볼을 잡으면 서로 소리치며 공을 달라고 했다. 나는 상황을 보아가며 득점을 쉽게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으면 누구라도 관계없이 패스했지만,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신동파에게 공을 주면 이인표가 쏘아붙였다. “왜 안 줘?” 신동파도 “야! 인마”하고 소리쳤다. 가끔 누구한테 공을 줘야 할지 어려울 때가 있으면 그들을 무시하고 내가 뚫고 들어가 득점을 기록하곤 했다. 그것이 어쩌면 러닝 가드를 슈팅가드로 부르게 된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혼자 하기도 했다. 우리는 여세를 몰아 다음 해 방콕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유희형 / 전 KBL 심판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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