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07. 02
“너, 어디서 야구했어.”
“너, 누구한테 야구 배웠어.”
예전에 프로야구 어느 감독이 판정 시비를 걸 때면 삿대질을 하며 자주 사용했던 말이다. 심판들이 대개는 선수 출신이기는 해도 이를테면 ‘족보’가 없고 무명이었다는 점에서 다소 깔보는 듯한 투로 그렇게 따지고 들었던 것이다. 선, 후배를 들먹이는 것도 단골 메뉴다.
당연하게도, 대가 센 심판들은 그런 어투에 심한 모욕감과 반발심이 들었을 것이다. 거꾸로 감독이나 코치들에게 위압적이고 권위를 내세우는 심판도 있었다. 그런 감독과 심판이 맞부딪친다면, 사단이 나기 마련이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옛 말이 하나도 그른 게 없다. 판정의 정당성을 따지다가 엉뚱하게도 서로 말꼬리를 잡거나 말투가 불씨가 돼 일이 크게 번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 바탕에는 반감과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예에서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지난 2000년 6월 25일 대전구장에서 벌어진 시비도 시작은 어찌 보면 아주 사소한 일에서 비롯됐다.
삼성 라이온즈와 한화 이글스의 시즌 11차전이었다. 0-1로 뒤지던 한화가 3회 말 이영우의 2점 홈런으로 2-1로 역전한 다음 후속 2번 강석천의 몸에 맞는 볼 판정 문제가 시비의 발단이었다.
강석천이 삼성 선발 노장진의 3구째에 오른 팔을 맞았다며 1루로 걸어 나가려는 제스처를 취했다. 허운 주심은 강석천을 잠깐 제지한 뒤 그의 팔뚝을 확인하고 나서 몸에 맞는 볼로 인정했다.
그 대목에서 계형철 삼성 투수코치가 달려 나가 “공에 맞은 것은 인정하지만 맞는 순간 스윙 동작 때 일어난 것이므로 몸에 맞는 공이 될 수 없다”고 항의했다.
실랑이 과정에서 허운 주심과 계 코치 사이에 언성이 높아졌다. 계 코치가 허운 주심의 반말을 걸고 넘어지면서 “왜 반말을 하느냐”며 시비가 곁가지로 옮겨 붙었다. 상스러운 소리가 나오자 허운 주심이 계 코치에게 곧바로 퇴장을 선언했다.
그 때 계 코치의 어필을 말리러 나왔던 김용희 삼성 감독이 느닷없이 허운 주심의 가슴팍을 한 차례 밀쳤다. 김 감독도 퇴장 선언을 당했다. 감독으론 그해 첫 퇴장이었다.
그 장면에서 삼성 코칭스태프가 우르르 몰려 나와 허운 주심을 둘러싸고 심판진과 심한 몸싸움을 벌였다. 그 와중에 계형철 코치가 허운 주심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허 주심은 눈두덩이 부위에 3cm 가량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다.
주위의 만류로 몸싸움이 가라앉은 다음 허운 주심은 심판실로 들어가 “맞아가면서까지 심판을 할 수 없다”며 경기 속개를 거부, 경기가 오후 7시27분부터 20분간 중단되는 일이 벌어졌다.
사태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6회 말 한화 강석천 공격 때 삼성 두 번째 투수 최창양의 1, 2구가 볼로 판정 되자 3루 쪽 덕 아웃에 있던 이순철 삼성 코치가 달려 나가 허운 주심에게 달려들어 몸싸움을 벌이다 또 퇴장당한 것이다.(그 경기는 결국 한화가 6-3으로 이겨 시즌 상대전적을 5승1무5패로 균형을 맞추었다)
그해 삼성과 한화는 악연의 연속이었다.
4월 23일 대구 경기에서 이영재 1루심의 판정에 항의하던 이정훈 한화 타격코치가 퇴장 당했다.
6월 11일 대구 경기에서는 삼성 정경배와 한화 김병준이 빈볼시비로 주먹다짐을 벌여 나란히 퇴장선언을 당하는 등 양팀간에 유난히 트러블이 잦았다.
삼성 코칭스태프에게 폭행당해 피를 흘렸던 허운 심판은 사건 소식을 듣고 급히 대전으로 내려온 김찬익 한국야구위원회(KBO) 심판위원장에게 “관중들 앞에서 주먹질을 당하며 심판 직을 계속 수행할 수 없다”며 사의를 표명했다. 김 위원장은 “상처를 치료하고 충격도 가라앉힐 겸 며칠 쉬도록 조치했다. 그 사이 사퇴의사를 번복하도록 설득할 계획이다”고 사태 수습에 나섰다.
당시 사건 현장 관계자들의 말이다.
계형철 삼성 투수코치=심판이 판정을 내리는 것은 고유권한이다. 그러나 엄연히 선후배라는 윤리가 존재하는데 함부로 반말 투로 대해서야 되겠는가. 일이 이렇게까지 확대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통감한다. 미안하게 생각한다.
김용희 삼성 감독=순간적인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 내 잘못이 크다. 처음에는 말렸는데 분위기에 휩쓸리는 바람에 이성을 잃었다. 심판들의 고압적이고 경직된 경기운영은 문제다. 하지만 그라운드에서 성숙된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사과를 드린다.
허운 주심=아무리 심판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현실이지만 주먹에 맞으면서까지 심판을 할 생각은 없다. 내일 당장 심판을 그만두는 한이 있더라도 그라운드에 주먹이 오가는 작금의 사태를 그냥 넘길 수 없다.
김재하 삼성 단장=최근 경기가 제대로 안 풀리는 등 안팎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돌발적으로 일어난 일이다. 어쨌든 야구팬들에게 불미스런 모습을 보여 죄송스럽다. 한국야구위원회에서 결정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 결과에 따르겠다. 김 감독이 출장정지를 당하면 선임인 장효조 타격코치가 팀을 맡게 될 것이다.
사건 후 KBO 상벌위원회는 6월 27일에 상벌위원회를 소집, 벌칙내규 제6항(감독, 코치 또는 선수가 폭행으로 경기장 질서를 문란케 했을 때 제재금 200만 원 일하, 출장정지 30게임 이하)을 적용, 김용희 감독에게 출장정지 6게임, 제재금 200만 원, 이순철 코치에게 출장정지 10게임, 제재금 200만 원 부과 중징계 조치를 내렸다.
또한 주심을 때린 계형철 코치에게는 구타에 대한 규정인 벌칙내규 제2항(제재금 300만 원 이하, 출장정지 30게임 이하)을 적용, 출장정지 18게임, 제재금 300만 원을 물렸다.
한편 KBO는 그와 아울러 “앞으로 비슷한 사태가 재발할 경우 대회요강 벌칙내규와 별도로 무기한 출장정지 등 엄중 제재하기로 했으며, 야구규칙 9.02(b) ‘심판원의 재정이 규칙에 위반된다는 정당한 의심이 있을 경우, 감독만이 그 재정에 관하여 올바른 규칙 적용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을 엄격히 적용, 경기 중 감독이 아닌 코치가 심판에게 어필할 경우 즉시 퇴장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 사건은 우발적으로 일어났지만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일선 지도자가 심판에게 손찌검을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판정항의→욕설에 이은 몸싸움→폭행의 나쁜 전철 밟아나갔던 유사한 사건들을 빼다 닮았다.
사실 ‘스윙동작에서 볼에 맞았는가, 아닌가’는 코치가 어필할 일이 아니다. 감독만이 문제 제기가 가능하다.
논쟁의 핵심을 벗어나 감정싸움으로 치닫고, 선후배간의 위계를 따지고 험한 말투가 불씨가 된 것도 어디서 많이 봤던 소동이었다. 선배인 계형철(당시 47살로 허운 주심보다 6살 연상) 코치가 ‘반말 투’를 꼬투리 잡아 급기야 주먹을 휘두르는 사태로 번졌고, 김용희 감독은 싸움을 말리러 나왔다가 되레 흥분, 주심을 몸으로 떼미는 실수를 저질렀다.
홍윤표 선임기자
자료출처 : O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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