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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EGENDS] ⑤ 돌파의 달인 이인표

---KBL Legends

by econo0706 2022. 9. 19.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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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2. 04

 

한국농구의 1960~70년대는 ‘신동파의 시대’라 불린다. 국내는 물론 해외 언론에서도 신동파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다. 1967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시아 베스트5에 한국에서만 2명의 스타가 뽑혔지만, 신문지상에는 신동파의 이름만이 잉크로 번졌다. 하지만 신동파의 옆에는 이인표도 있었다. 9년간 국가대표를 지내며 ‘돌파의 달인’으로 통했던, ‘한국농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스코어러였다.

 

Q. 1960~70년대 돌파의 달인이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달인까지는 무슨. 슛보다 드라이브 인이 조금 더 뛰어나다 보니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일 뿐이지. 아무튼 돌파가 다른 것보다 더 쉬웠던 것은 사실이야. 드리블하고 그런 것에 자신이 있었어. 남들보다 팔이 조금 더 길고 어깨가 넓어서 내가 유리한 조건이었으니까.

 

Q. 농구는 언제 처음 시작했나요?


광희중학교 3학년 때 처음 시작했지. 선수가 부족해서 우연하게 시작했을 거야. 내가 키도 별로 크지 않았는데도 농구를 시킨 거 보면 거의 채우다시피 한 거지. 그때 물리 선생님인가가 공 갖고 노는 모습을 보고 시켰어. 그러다보니 제대로 하지는 못했지.

 

Q. 그래도 제안에 선뜻 승낙을 하셨나 봐요?


나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심정이었어. 그 당시는 농구 골대도 잘 없던 시절이라 해볼 기회도 없었고. 부모님은 반대를 하셨지. 그런데 그 선생님이 적극적으로 설득을 하셨어. 그래서 처음 하게 됐지.

 

Q. 재미가 있던 가요?

 

재미가 있더라고. 내가 팔이 기니까 골 밑에서 잡아서 슛 쏘고 그랬지. 나보다 키 큰 애가 있었는데도 나보고 센터를 보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Q. 처음부터 가드를 맡은 게 아니었나 보군요.


나는 센터로 시작을 했어. 가드는 굉장히 늦게 봤지. 국가대표팀에서는 포워드를 오래 했고, 은퇴 무렵에 가드를 보기 시작했지. 그러니까 난 포워드라고 부르는 게 맞을 거야.

Q. 과거 농구를 돌이켜보면 슈터에 대한 이야기는 많았지만, 돌파를 한다는 것은 잘 상상이 안 되거든요.


그 당시는 지금처럼 속공이 그렇게 많이 발달되지는 않았어. 필리핀이 드라이브 인을 주로 한다면 우리는 주로 슛이 무기였지. 그때는 가드보다 오히려 포워드가 어시스트를 더 많이 했어. 돌파를 한 다음에 밖으로 빼주는 패스를 하거나 센터와 2대2 플레이가 많았거든. 김영기 씨가 돌파가 좋았지.

Q. 슛도 좋았다고 들었습니다.


신동파처럼 슛 거리는 멀진 않았고, 3점 안쪽 슛이 많았지. 돌파하다가 스톱 슛을 많이 던졌어. 신동파하고는 선의의 경쟁을 한 거지. 난 일대일 돌파 위주였고, 신동파는 슛이 전문이었어. 아마 둘 다 슛을 했으면 잘 안됐을 거야. 그래서 조화가 잘 됐던 게 아닌가 싶어.

 

Q. 언제 가장 기량이 늘었다고 생각하세요?


주로 경복고나 배재고로 진학을 많이 했지만, 난 본교인 성동공고로 바로 올라가면서 기량이 늘기 시작했어. 1학년 때는 선배들 때문에 거의 못 뛰었지만, 2학년에 올라가서는 많이 뛰기 시작하고, 발전을 많이 했지. 우리 학교가 우승도 하는 팀이었거든. 그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거야.

Q. 개인연습도 많이 하셨을 것 같은데요?


개인연습을 정말 많이 했지. 방과 후 본 연습이 끝나면 남아서 1시간 이상씩 연습을 했었어. 전기가 거의 없던 시절이니까, 어두워지면 코너에 촛불을 하나씩 켜놓고 뿌연 상태에서 연습을 하는 거지. 지금은 불나서 큰 일 나. 그런데 그때는 많이들 그랬어. 사람 대신 의자를 높게 쌓아 놓고 피하면서 드리블도 연습하고, 돌파도 해보고 그러는 거지. 어두워서 슛도 더 좋았던 게 아닐까 싶어. 내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도 됐고.

Q. 농구 훈련은 어디서 하셨나요? 체육관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시절이잖아요.


체육관이 귀하던 시절이었는데, 우리 학교에는 체육관이 있었어. 체육관이라고는 해도 지금의 강당 수준이라고 봐야지. 체육관 천장이 낮아서 슛을 높게 쏘면 천장에 닿을 정도였지. 비가 오면 은행팀이나 대학팀들이 와서 연습을 많이 했었어. 나한텐 그런 게 다 유리한 조건이었지. 누가 가르쳐 주는 것보다 잘 하는 선수들 하는 것을 보고 연습하는 게 더 효과적이거든. 김영기 씨 플레이를 많이 보고 따라하려고 노력 많이 했지.

Q. 그 당시 농구에 대해 생생히 알고 싶습니다. 신발, 유니폼, 농구 장비 등 지금과는 차이가 많았을 것 같아요.


차이가 정말 많이 났지. 유니폼도 학교에서 해주긴 했는데, 거의 남대문에서 사와서 동대문 운동장 앞에 있는 상가에서 마크만 다는 형식이었지. 사이즈가 맞지도 않아.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그냥 입고 뛰는 거지. 유니폼 하의가 짧았던 것도 알지?

Q. 농구화도 제대로 없었잖아요?


그때 농구화는 대만제가 좋았어. 대만제 중에서도 ‘회력’에서 나오는 것과 ‘세계광’이라는 데서 나오는 농구화가 있었는데, ‘회력’이 제일 좋았지. 우리나라에서도 동신화학이란 곳에서 농구화 비슷하게 나오는 게 있긴 했는데, 선수들은 못 신는 운동화야. 그러다보니 어쩌다 부모님이 한 번 사주시면 연습 때는 신지도 못해. 아끼고 아꼈다가 시합이 있는 날만 꺼내서 신는 거지. 연습 때는 남대문에서 산 누런 운동화를 신고 뛰는 거지. 그러다 펑크 나면 운동화 바닥만 따로 때워 주는 데가 있었어. 농구화가 비싸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신어야 했었지.

Q. 정말 놀라운데요. 그럴 정도면 농구공도 귀했겠어요.


그럼, 귀했지. 연습은 거의 대부분 야외에서 했기 때문에 농구공도 가죽이 아니라 고무공으로 썼어. 가죽공은 금방 닳으니까 연습 때는 고무공으로만 하는 거지. 고무공도 많이 하면 국산 거는 짱구가 돼서 해외 것을 썼지. 고무공만 같고 하다가 체육관에서 가죽 공을 만지면 손에 쩍쩍 달라붙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도 종별선수권을 야외에서 했었는데, 대회에서 쓰는 공 역시 고무공이었지.

Q. 슬럼프 극복 방법도 달랐나요? 요즘은 소위 ‘소풍’을 가는 선수들도 있잖아요.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직전 고려대 체육관에서 연습하다가 발목을 다치는 바람에 부은 상태로 아시안게임에 출전해 많이 뛰지 못했지. 그때가 슬럼프라면 슬럼프인가. 지금 프로처럼 시합이 많지 않아서 슬럼프나 소풍, 이런 건 별로 없었어.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도 잘 하는 애들이 힘들다고 나가서 안 오기도 했었지만, 지금처럼 그런 건 별로 없었어. 어쩌다 있는 거였지.

Q. 제가 믿기 힘든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두 번 씩 다닌 선수들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많았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야 할 사람이 중학교 3학년 때 같이 뛸 정도니까…. 내가 초등학교 때 중학교 3학년을 응원하러 가서 본 사람이 내가 중학교 3학년이 됐는데 아직도 뛰고 있는 거지. 허허허. 그땐 4~5살 위 사람들도 많았어. 학교에서 우승하기 위해 졸업을 안 시키고 계속 묵혀 두는 거지. 정확한 룰이 없으니까, 학교에서 마음대로 한 거야. 얼마나 우스운 일이야.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사람들은 고등학교 가서는 별로 활약이 없었어.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도태되더라고. 지금 남아 있는 사람도 없으니까.

Q. 당시 고교 라이벌도 치열했겠어요.


라이벌이 많았지. 김인건, 박종수, 김철갑, 이병구, 방열 등 경쟁이 치열했어. 휘문고하고 경복고가 우승을 주로 하고 난 우승을 못했지. 선수들끼리 경쟁은 심했지만, 서로 이야기도 많이 하고 같이 아이스크림 사먹던 사이들이었어.

Q. 연습을 같이 하기도 했나요?


전차가 다니던 시절이니까, 늦으면 전차 길이 비어 있거든. 우리는 그 길을 따라 드리블 연습을 하면서 뛰어다니는 거야. 밤 12시가 되면 순경이 호루라기 불면서 따라오고 우리는 도망치고 그랬지. 지금은 그런 추억이 생각이 많이 나.

Q. 체력 훈련은 주로 어디에서 하셨나요?


요즘은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는 시스템이 있지만, 그땐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냥 동네 가면 만들어 놓은 역기를 간혹 들다가 남산 뛰어 다니는 게 훈련이지. 그 당시엔 토끼뜀을 엄청 시켰어. 그게 바로 무릎이 안 좋아진 계기야. 토끼뜀이 무릎에 가장 안 좋은 거라 지금 시키면 무식하단 소리 듣는 거지.

Q. 가장 추억에 남는 농구 경기가 있다면요?


아무래도 1969년 ABC 대회가 가장 기억에 남지. 1967년 서울에서 필리핀한테 결승에서 졌어. 절호의 기회였는데도 우승 찬스를 놓친 거지. 1968년 멕시코 올림픽을 가서도 순위 경쟁에서 필리핀에 1점차로 지고…. 그러다 1969년 ABC대회에서 설욕을 하고 1970년 아시안게임까지 첫 재패를 하게 됐지. 그때가 제일 기억에 남아.

Q. 비화도 많이 알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기억에 남는 뒷이야기들은 없나요?


김영기 씨가 코치를 하던 때야. 1969년 ABC대회에 앞서 태국에서 훈련을 하는데, 선수들이 너무 말들을 잘들은 거야. 우리한테 트집 잡을 게 없으니까, 갑자기 나를 혼내는 거야. 시간도 철저하게 맞춰서 들어왔는데, 생트집을 잡아 날 호되게 야단치더라고. 후배들 앞에서 선배라고 본보기로 혼을 낸 거지. 후배들 앞이니 얼마나 억울하고 섭섭했겠어. 그래도 그때는 말도 못하고 꾹 참았어. 그리고 우승을 이뤄낸 다음에 물었지. 그랬더니, 긴장을 주기 위해 혼을 내긴 내야겠는데, 너무 잘한다는 거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선배인 나한테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라고. 나중에 나도 지도자를 했지만, 선수들에게 긴장을 줘야 한다는 것도 그 때 배우게 된 거지.

 

Q. 한국 농구의 전성기를 이끌면서 전설 같은 선수들과 함께 뛰셨잖아요. 김인건 씨와 유희형 씨도 함께 뛰었는데, 누구와 더 호흡이 잘 맞았나요?


김인건은 돌파보다는 중거리 슛이 좋고, 어시스트를 잘 했어. 호흡은 늘 달라. 둘이 스타일이 달랐으니까. 유희형은 돌파가 강하니까 속공 때 잘 맞고, 김인건은 패턴에 의한 세트 오펜스 상황에 잘 되는 선수였거든.

Q. 신동파에 가려진 것은 아니었나 생각도 드는데요. 라이벌 의식도 있었을 것 같고요.


신동파와는 농구 스타일이 다르긴 했지만, 라이벌 의식이 있긴 했지. 1967년 ABC대회 준우승을 하고 아시아 베스트 5를 뽑는데, 신동파와 내가 뽑혔어. 그런데 신문에는 신동파만 더 크게 나온 거야. 그 당시에는 불만이 조금 있었지. 그런데 그게 세계선수권 대회에 나가서 문제가 된 거야. 신동파는 패스를 받아서 쏘는 스타일인데, 어린 마음에 신동파한테 패스를 주지 않고 내가 그냥 하나 더 쏘는 거지. 그 당시 농구협회 단장이 신동파한테 왜 못하냐고 할 정도였으니까, 패스를 엄청 안 준 거지. 그러면서 우리가 이러면 안 되겠다고 느꼈지. 그래서 다시 패스를 주기 시작했어. 아마 신동파가 유고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가장 성적이 안 좋았을 거야.

 

Q. 은퇴 후 삼성에서 여자팀을 창단하셨어요.


1975년에 삼성에서 여자팀을 만들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난 못한다고 그랬지. 남자팀을 만들면 하겠다고 했더니, 남자팀은 나중에 만들어주겠다고 그러는 거야. 그렇게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가게 됐지. 그 때 조승연 코치와 함께 여자팀을 만들었지. 여자팀 창단하자마자 바로 남자팀을 만들자고 건의해 다음해인 1976년에 남자팀을 만들었어. 그러면서 삼성과 현대의 싸움이 시작됐지. 현대도 몇 발 늦은 같은 해에 남자팀을 만들었거든.

Q. 여자팀을 창단하고 나서 책임과 부담 등 어려운 점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은행이라는 데는 조용한데야. 그런데 기업은 스포츠를 만들면 무조건 선두를 해야 한다는 게 깔려 있었지. 삼성은 더 심했어. 창단 초기에 여자팀은 삼성이 실패를 봤지. 제도상으로 박찬숙은 못 데려오게 되어 있었고, 성정아와 김화순을 데려오면서 팀이 되기 시작했어. 남자와 여자팀 감독을 동시에 맡고 있었는데, 선수 데려오는데 점점 돈이 들기 시작하는 거야. 스카우트의 전쟁이 시작된 거지.

Q. 당시 스카우트가 궁금합니다. 지금처럼 제도상으로 정해진 것이 별로 없었잖아요?


경쟁이 너무 치열해져서 전쟁이나 다름없었어. 서류화 되어 있지 않으니, 무조건 선수만 잡고 있으면 되는 거야.

Q. 스카우트 관련된 비화도 많을 것 같은데요.


정말 많지. 이야기하다보면 오늘 다 못 해. 고려대에 이동균이라는 선수가 있었어. 삼성과 약속을 해서 들어오기로 했는데, 그 당시 같이 오기로 했던 선수 한 명은 현대 간다고 몰래 탈의실로 도망가고 이동균만 데리고 제주도로 갔어. 제주도에 있는데 현대에서 헬기를 띄운 거야. 현대 헬기가 울산에서 날아와 이동균을 데리고 다시 울산으로 간 거지. 삼성이 가만히 있나? 다시 헬기 띄워서 그 선수를 다시 데려오는 거지. 당시 이동균이란 선수가 스타플레이어도 아니었는데, 기업 간 보이지 않는 자존심 전쟁이 그만큼 심했던 거야.

Q. 단장만 세 번 맡았어요. 특히, 삼성에서 오래 계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나 일이 있다면요?


임정명하고 김현준이 기억에 남지. 임정명이 팀을 위해 궂은일을 하는 선수였다면 김현준은 슛에 있어서는 대단한 선수였지. 이충희 때문에 슛은 빛이 가렸지만, 드라이브 인이나 돌파는 이충희보다 좋았어. 돌파해서 백보드를 보고 점프슛 하는 것이 주특기였지. 정말 성실하고 연습벌레였던 선수라 지도자를 해도 잘 했을 텐데, 안타깝지. 신동찬도 기억에 남아. 큰 키에도 어시스트와 디펜스가 모두 다 좋았어.

 

Q. KBL 출범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당시 스카우트 열기가 뜨거워져서 프로로 전향을 하게 된 건가요?


스카우트로 드는 시간과 돈도 만만치 않고, 그게 너무 오래 되다 보니까 삼성도 고민이 생기기 시작한 거지. 김현준을 뽑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스카우트에 대한 회의가 들었던 것 같아. 삼성과 현대가 자꾸 과욕을 부리고 돈으로만 선수를 뽑으니까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하고 느낀 거지. 김영기 씨와 함께 겨울스포츠로 가자고 결정을 내리고 프로를 만든 거지.

Q. 농구대잔치는 물론이고 프로출범을 주도했는데, 한국 농구가 처음 생각하신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보는지요?


기업이나 금융권이 있던 농구대잔치에서는 선수들이 은퇴 후 과거에는 기업 부장이나 은행 지점장이 되는 것이 최고였지. 그 이상으로는 올라가기 힘들었어. 그래서 프로를 만들어 전문성 있는 선수로 수명을 스스로 관리하게 만들자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지. 그래서 농구선수 외에도 심판, 지도자 등 모든 것을 연봉체제로 변화시킨 거야. 농구인으로 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 생각이 달랐던 아마농구인들의 2년간의 반대를 뚫고 KBL을 출범하게 됐지.

Q. 현재 프로에서 뛰고 있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없으신가요?


영원한 프로선수는 없어. 그걸 알아야 돼. 그러니까 있을 때 최선을 다해야지. 연예인하고 똑같아. 나중에 도태되지 않으려면 현역에서 뛸 때 경제관념을 갖고 노후 대책을 잘 세워 나야 해. 항상 팬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좋은 일에 기부도 하고, 후배 양성도 할 수 있는 진정한 인생의 프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야. 더 변해야 되겠지….

이인표는...


신동파와 함께 1960년대 한국농구를 이끈 이인표는 1943년 서울 출생으로 성동공업고등학교와 건국대를 거쳐 산업은행에서 농구선수로 활약했다. 1962년부터 1971년까지 대표팀에서 뛰며 1969년 ABC대회 및 1970년 아시안게임 사상 첫 우승의 주역이 되었고, 삼성 남녀농구단 창단 감독 및 국가대표 감독, 코리아텐더 초대 단장, 삼성전자, 삼성 썬더스 단장을 역임했다. 또한 대한농구협회 및 농구대잔치, 한국농구연맹 창설위원, KBL 패밀리 회장을 맡고 있다.

 

※ 이 글은 JUMPBALL 스페셜 에디션「TEAM KOREA」에서 발췌했습니다.

 

서민교 기자

 

자료출처 : 점프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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