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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EGENDS] ③ '한국농구 최초의 테크니션' 김영기

---KBL Legends

by econo0706 2022. 9. 19.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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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1. 21 

 

한국 농구 역사에서 ‘김영기’라는 이름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선수’ 김영기는 한국 농구 최초의 테크니션이자 아시아 최초로 한국 농구의 위상을 알린 인물이다. 6‧25 전쟁 속에서도 농구의 역사를 꽃피워 온 한국 농구의 살아있는 역사였다. 또 한국프로농구 출범을 이끈 주역 중 하나이기도 했다.

 

Q. 한국 농구에 있어서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는데, 언제 처음 농구를 접하셨는지요?

 

농구를 좀 늦게 시작했어. 그게 아마 6‧25 전쟁 때였지. 1952년도 고등학교 1학년 때였으니까, 휴전 이전이었어. 농구는 원래 그 전부터 관심이 있어서 좋아했었고….

 

Q. 전쟁 중인데도 농구를 할 수 있었나요?


피난이라고 아나? 피난을 다니면서도 학교는 다녔으니까. 대신 농구는 당연히 못했지. 전쟁 중인데, 농구한다는 게 말이 되나. 대구 저 밑에까지 피난 갔다가 다시 서울로 밀고 올라와 학교를 다니면서 다시 하게 된 거야. 배재고에 다녔었거든. 그래서 남들보다 늦게 농구를 시작했어.

Q. 처음 농구와의 인연이 궁금합니다.


전쟁 막바지였을 때지. 배재고에는 당시 같은 학년만 350명 정도가 있었는데, 전교생이 무조건 과외 활동을 하게 되어 있었어. 지금으로 따지면 클럽 활동이라고 해야 하나. 동아리 활동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구기 종목부터 해서 겨울엔 빙상까지 체육부가 10개 이상 있었고, 연극반 같은 것도 있었지. 생각해보면 그때가 교육제도가 더 좋았던 것 같아. 반드시 어느 하나는 들어가야 했었거든. 그렇게 나는 농구부를 들어가게 된 거야.

Q. 과외 활동이라면 학업 수업 이후에 운동을 하셨겠군요.


5~6시간 공부 끝나고 오후 3시 반이나 4시 반쯤부터 과외 활동에 들어갔어. 처음엔 키가 작아서 선생님이 농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지 말라는 거야. 지금은 180cm 정도 되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는 160cm가 조금 넘었으니까. 고등학교 1학년 말부터 키가 자라기 시작해 대학교 때까지 컸지.

Q. 농구의 어떤 매력에 끌리셨던 건가요?


지금은 NBA도 볼 수 있지만, 그때는 그런 게 없을 때라 체육관도 없이 옥외에서만 농구를 했어. 단체 경기 중에는 조직적이고 지적인 운동이라 생각했지. 축구와 럭비는 너무 거칠게 하니까…. 농구는 좁은 공간에서 하면서 서로 도와주는 플레이가 많잖아. 나도 요즘 청소년들이 느끼는 것과 똑같았지.

 

Q. 당시 농구부가 궁금합니다.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겠어요?


지금하고 다르지. 봄이나 가을에 경기가 있으면 그때 모여서 농구를 집중적으로 했었어. 특히, 방학 같은 때 모여서 주로 연습을 하곤 했지. 밥 먹고 농구만 한 게 아니라 밥 먹고 공부도 하면서 농구를 했었어.

Q. 당시 농구부 모집이 특이했었다고 들었어요.


박순철 선생이라고 있었어. 피난 갔다 와서 농구부를 다시 창단하셨는데, 모집 방법이 참 이상하다고 해야 하나, 특이하다고 해야 하나. 우등생이 아니면 농구부에 뽑질 않았던 거야. 그 다음에 보는 게 키였지. 당시 반장이나 부반장, 교련 과목이 있어서 대대장, 중대장 등 간부들만 농구부를 하게 했어. 그래서 그때 같이 농구했던 사람들이 서울대, 연대, 고대를 다 들어갔어. 계속 농구를 한 사람도 있었지만, 서울 공대 들어가 MIT 박사까지 한 친구도 있었고. 우등생만 뽑았으니, 당연한 거지. 아무튼 특이한 선생님이셨어.

Q. 당시 농구부에 전문적인 코치는 없었을 것 같은데요.


코치는 선생님이 하셨는데,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고 그랬지. 코치가 없을 때는 선배가 가르치기도 하고…. 우리가 할 때는 다 그랬어. 배재고를 비롯해 경기고, 서울고, 양정고 등 5대 사립학교가 있었는데,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우승도 하고 준우승도 했지. 서울고와 경기고는 농구만 전문적으로 하기 시작하면서 없어지더라고.

Q. 당시 대학 입학 후 농구는 어떠셨는지요?


1955년도에 배재고를 졸업하고 고려대 법학과를 들어갔는데, 대학을 가니까 조직적으로 농구를 하기 시작하는 거야. 그때는 대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해야 학점을 받을 수 있었거든. 그래서 그 당시에는 졸업을 못한 운동선수들이 많았지. 오히려 요즘이 그 때보다 교육면에서는 굉장히 퇴보한 거지. 그 당시 대학은 요즘 미국 하버드나 예일대처럼 시켰으니까.

Q. 대학을 졸업하는데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사건이 좀 있었지. 내가 6개월을 늦게 졸업했거든. 그 당시 외국 원정을 갔는데, 학교에 승인을 받지 않고 갔다 왔다고 정학을 준거야. 방학 때라 총장 승인도 받지 못 하는 상황인데다, 그 당시엔 외국 나가는 것만 해도 대단했던 거였거든. 지금 같으면 소송감이야. 허허.

Q. ‘한국 최초의 테크니션’이란 수식어도 있습니다. 당시 기술은 어떻게 습득하셨는지요?


고등학교 때는 거의 기술이 없었다고 봐야지. 대학 들어가서 전문적으로 기술을 익히기 시작했어. 장충체육관이 열리면서 미국 코치를 초빙해 선진 농구를 배우기 시작한 거지.


Q. 미국 코치를 초빙했다니, 신기한데요.


그때는 농구 뿐 아니라 스포츠, 문학 등 각 분야에 대해 문화산업 일환으로 미국에서 원조를 하던 시기였거든. 그 당시 코치에게 한 달에 3천 불씩을 줬었어. 내가 한 번 요즘 환율로 따져 보니, 10만 불 정도 되더라고. 한 달 월급이 1억 원이었던 거지. 물론, 비용은 미 국무성에서 냈고. 그때 근대 농구를 처음 익혔던 거지.

Q. 코치로 어떤 분들이 오셨었는지 기억하시나요?


미국 뉴욕 니코보커스 넷 홀맨(Nat Holman) 헤드 코치와 존 번(John Bunn) 코치가 초빙 됐었지. 지금 같으면 NBA LA 레이커스의 필 잭슨 같은 사람이 온 거라 보면 돼. 그러니, 얼마나 대단해. 생각을 해봐. 필 잭슨이 와서 가르쳤으니, 얼마나 다르겠어. 존 번 코치는 대학선발만 집중적으로 가르쳤고….

Q. 언어도 잘 통하지 않았을 텐데, 어떤 방식으로 가르쳤나요?


지금은 자료가 많지만, 그때는 비디오도 없었기 때문에 필름을 하나하나 보여주며 가르쳤지. 오전에는 무조건 2시간 강의를 들었고, 오후 3시부터 농구 실기 훈련을 했어. 만 2년 동안 영어도 배우고, 농구 기술도 배웠으니, 우리가 얼마나 탄탄했겠어. 아마 아시아에서는 우리가 가장 탄탄하게 배웠을 거야.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농구가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던 거지.

Q. 시설이 상당히 열악했던 시대 아니었나요?


하나 불행했던 게 바로 그 부분이야. 전쟁이 끝나고 나서니까 마땅한 시설이 없었지. 그래도 당시 우리나라가 미국 농구에 가장 가까운 농구를 한다는 평을 들었어. 그럴 수밖에 없지. 지금의 기술을 그 당시에 다 시작을 한 거니까. 3점슛은 없을 때였지만, 비하인드 백 드리블이나 비하인드 백 패스, 트위스트 슛도 다 그 때 시작했지. 요즘은 더블 클러치라고 하드만….

Q. 체육계가 상당히 보수적이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정석적이지 않은 기술사용에 어려움은 없었나요?


왜 없었겠어? 바로 귀싸대기 맞았지. 왼손으로 드리블만 하더라도 안정감 없다고 하지 말라고 했던 시대였으니까. 무조건 바른 손만 하라고 하는 거야. 그런데, 미국 코치들이 들어오면서 우리가 그런 생각을 다 깨 버린 거지.

Q. 특별히 기술을 익히기 위해 훈련을 하신 것은 없으셨나요?


기술이라는 것은 코치가 가르치는 게 아니야. 코치는 기본기만 가르쳐주면 되는 거지. 무조건 따로 연습을 해야지. 차원이 높은 기술은 본인이 직접 훈련에 훈련을 거쳐야 습득이 되는 거거든. 3대3 같은 동네농구가 좋은 게 그런데서 기술이 많이 늘거든. 개인기는 단체 훈련에서 생기는 게 아니야.

Q. 개인 훈련 시간을 얼마나 가지신 건가요?


지금처럼 8시간씩 훈련을 하는 것이 아니라 1~2시간만 단체 훈련을 하고 나머지는 개인 훈련하는데 시간을 많이 할애했어. 원서로 된 책이나 미군들이 보던 잡지도 많은 도움이 됐었지. 미8군에 와 있는 애들하고 시합도 많이 했고.

Q. 당시 미군이라면 기량차가 많이 났을 것 같은데요.


그 때는 징집제였기 때문에 2년 간 주둔을 하는 식이어서 뉴욕 닉스나 LA 레이커스에서 뛰던 미국 프로농구 선수들도 꽤 있었어. 8군 사령관 주최로 하는 대회도 있어서 국내 팀 소속으로 나가 미 프로선수가 있던 상대팀을 상대로 우승도 하고, 준우승도 하고 그랬지. 그 때 정말 많이 배웠던 것 같아. 그래도 올림픽은 안 되더라고. 미국도 그렇지만, 유럽도 너무 큰데다 아시아는 1개 팀 밖에 자격이 없었으니까 출전 자체가 힘들었지.

Q. 현역 시절 어떤 선수였는지 궁금합니다.


내·외곽을 안 가리고 득점을 올리는 스타일이었지. 신동파가 천부적인 3점 슈터라면, 나는 올 어라운드 선수에 가까웠지. 나중에 득점 분포도를 보면 코트 전체에서 거의 고르게 나타났었거든. 신동파하고는 도쿄올림픽에도 같이 가서 경기를 했는데, 아시아에서 톱이라는 칭호를 받은 것은 나 다음에 신동파라고 할 수 있지. 그 다음에 이충희와 허재 이야기가 나오지만, 아시아 베스트 5 정도라고 봐. 허허.

Q. 혹시, 가장 많이 넣은 득점이 몇 점 정도인지 기억하고 계신가요?


국내에서 내가 아마 48점인가를 기록했었고, 그 다음에 신동파가 52점을 넣었을 거야. 3점슛이 생기기 전까지 내가 기록을 하나 갖고 있었는데, 야투 성공률이 평균 58.8%였지. 슛 3개 중 2개는 넣었던 거지. ABC대회에서는 거의 평균 28점 정도를 넣었고. 그때도 게임 스코어 나는 것은 지금하고 비슷했거든.

Q. 현역 시절에는 유독 아시아 정상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친선 경기를 비롯해 각종 대회에서는 우승을 했는데, 유독 아시안게임과 ABC대회만 우승을 못했어. ABC대회가 1959년에 창설되고 내가 4회까지 나갔었는데, 결국 우승은 못했지. 그래도 우리 때부터 계속 상승세를 타기 시작해 1969년에 최초로 ABC대회에서 우승을 하게 된 거지.

Q. 그 당시 우승을 이뤄내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가 있다면요?


일단 나도 키가 작은데다, 같이 나갔던 선수 구성도 나보다 10살이 많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우승은 힘들었지. 같이 나갔던 선수 중에 두 손으로 슛을 쏘는 사람도 있었으니, 질 수밖에….

Q. 1960년대의 농구 열기는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지금보다 오히려 더 인기가 많았던 것 같아. 국내에서 대회를 할 때에도 그 큰 장충체육관이 꽉꽉 찼을 정도니까. 미국 코치들이 와서 가르치고, 전법도 완전히 바뀌니까 재미가 있었던 거지. 그때와 비교해보면 지금은 관중이 없는 거야.

Q. 지도자로서 정상에 올려놓으신 1969년, 1970년 대표팀은 한국 최초의 드림팀, 혹은 근대 농구사에서 가장 기능적이었던 농구팀이란 평가를 받았는데? 당시 어떤 준비를 하셨는지?


따로 준비를 했다기보다는 은퇴하고 2년을 쉬었다가 바로 감독을 맡으면서 선수들과 가깝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 된 것 같아. 당시 우승 주역이었던 신동파와는 같이 뛰기도 했으니까. 각자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역할에 충실할 수 있었던 거지.

Q. 대표팀 선발 방식을 예전의 주먹구구식에서 한국 최초로 데이터화 시켰다고 들었습니다.


처음으로 선수들 평점을 만들어서 객관화를 시켰지. 포지션별로 총 18명의 대표를 선발한 다음에 연습경기를 통해 최종 12명을 뽑았는데, 그때 평점을 이용했어.

Q. 평점이라고 하면 어떤 식으로 매기는 것이었나요?


플러스(+)와 마이너스(-) 요인으로 나눠서 매겼는데, 플러스 요인으로 득점을 비롯해 리바운드, 어시스트 등은 개당 1점씩이었고, 스틸은 속공과 연결되기 때문에 1.5점씩 줬지. 마이너스 요인은 실책(개당 1점)이나 슛 실패 횟수였어. 예를 들어 득점을 20점이나 하더라도 20개 슛 시도 중 10개가 성공한 것이면 -10점이 부과되어 +10점만 인정되는 방식이었지. 그렇게 객관화 시켜서 선수 선발을 했었어.

Q. 과거 스파르타식 농구 훈련 방법이 통하던 시절 최초로 과학화시키면서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셨어요. 국제 대회에서도 통할 수 있었던 이유였나요?


아시아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도 다양한 전법을 사용해서라 할 수 있지. NBA 방식을 많이 도입하기도 했고, 새로운 전법을 만들기도 해서 나오니까 다른 나라에서 당황했던 거지. 지역방어를 이용한 함정수비로 재미도 많이 봤고, 공격에서는 ‘G2’라고 내가 만든 전법인데, 지금도 농구를 보다 보면 자주 나오더라고. ‘G2’는 예전에 첩보 TV 연속극 제목이었는데, 갖다 붙인 거지. 시대가 지나도 변화가 없이 일반화되어 있더라고.

Q. 1969년 대회에서는 신동파 선수를 아껴놓고 있다가 마지막 필리핀전에 출격시켜 대 성공을 거두었다는 기사도 읽었는데요. 전략이셨는지요? 당시 신문 기사를 찾아보니, 신동파 선수기용을 의도적으로 자제했다는 이야기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신동파를 전략적으로 후보로 내보냈지. 최고의 선수를 나중에 내보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어. 신동파에 대한 견제가 워낙 심하다보니까 그런 방법을 쓴 거지. 다행히 통한 거지. 자칫 잘못했으면 국가의 역적이 될 뻔했어. 허허. 인생이 다 그런 거야.

 

Q. 우승 후 카퍼레이드도 있었고, 김포공항에 500명이 넘는 인파가 모였다고도 들었습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지. 그 때가 농구에 있어서는 첫 스타 탄생이라 할 수 있지. 지금까지 그런 기분으로 사는 것 같아.

Q. 오늘날 선생님의 플레이를 닮은 선수가 있나요?


지금은 그런 선수 선수들이 정말 많아. 예전에는 거의 없었지만, 고등부나 대학부 경기만 봐도 소질을 가진 선수는 많더라고. 요즘은 기술의 한계는 없는데, 정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게 문제야.

Q. 선생님은 한국 농구의 상징적 인물이십니다. 가장 보람된 일이 있다면요?


내가 감독에서 은퇴를 하고 금융권에 있으면서도 농구와의 인연은 놓은 적이 없어. 대한농구협회나 올림픽위원회 임원으로 계속 관여했지. 1969년 ABC대회를 처음 우승으로 이끌고, 1988년 올림픽 유치까지 이뤄내기까지 생각해보면 보람된 일이 참 많아. 그래도 역시 가장 보람된 일은 KBL(한국농구연맹)을 만든 거야. 반대하는 사람도 정말 많았지. 역경을 딛고 이룬 격정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거야.


김영기가 말하는 내 인생 최고의 순간


1997년 2월 1일. 날짜도 잊을 수 없다. 한국에 프로농구 시대가 열린 날이다. 이날 올림픽공원 제2체육관에서 프로농구가 화려한 개막식을 갖고 3개월간의 대장정에 돌입했다. 아시아권에서 프로농구가 도입된 것은 필리핀 대만 중국에 이어 4번째. HOT, 영턱스 클럽 등 연예인의 축하공연으로 시작된 이날 개막식은 선수단 입장, 김상하 전 농구협회장의 개회선언, 윤세영 한국농구연맹(KBL) 총재의 대회사로 이어졌고 기아 강동희 선수가 선수대표 선서를 했다. 이어 열린 안양 SBS 스타즈-인천 대우 제우스의 첫경기는 SBS가 대우를 108-107로 꺾으며 첫 테이프를 끊었다.


개막전이 끝난뒤 집에 돌아오는 길. 나는 한강 고수부지에 내려가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나만의 감격에 벅차 올랐다. “기어코 해냈구나.” 눈물이 글썽거렸다. 1995년 대한농구협회에 프로농구 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진지 4년여동안 얼마나 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따랐던가. 농구대잔치의 성공에 들떠있던 일부 농구인들은 내심 프로화를 반기지 않았다. 추진위원회 멤버들조차 두 갈래로 찬반이 갈렸고 협조는커녕 오히려 노골적인 반대와 방해를 일삼기도 했다. 끝까지 뜻을 함께한 것은 이인표, 최종규, 김인건 그리고 백남정 등 60-70년대 코트에서 함께 뒹글며 운동을 같이했던 동료들이었다.

 

김영기는...


한국 농구의 상징적 존재로 남아 있는 김영기는 가장 성공한 농구인이자 은행원이다. 1936년 출생인 그는 배재고를 거쳐 고려대, 기업은행에서 농구선수로 활약했다. 선수 은퇴 후 그는 남자농구대표팀 감독을 역임하며 1969년 ABC대회 및 아시안게임 사상 첫 우승을 이끌어 명장 반열에 오른다. 그는 감독 은퇴 후에도 은행 업무에서 발군의 실력을 과시하며 기업은행 지점장, 신용보증기금 이사 및 감사, 신보창업투자 사장을 지냈고, 대한올림픽위원회(KOC) 부위원장, 농구협회 부회장 등을 거쳐 프로농구 수장인 한국농구연맹(KBL) 총재를 역임했다.

 

※ 이 글은 JUMPBALL 스페셜 에디션「TEAM KOREA」책에서 발췌했습니다.

 

서인교 기자

 

자료출처 : 점프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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