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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추억, 예순 세 번째] 1992년을 뒤흔들었던 김민호

--김은식 야구

by econo0706 2022. 12. 5.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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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09. 07 

 

빈약한 4번 타자? 그러나 '자갈치 근성' 빛났다

 

1984년에 데뷔해 1993년까지 10시즌동안 통산 40개, 시즌 평균 4개씩의 도루만을 기록했던 자이언츠의 4번 타자 '자갈치' 김민호. 그가 나이 30대 중반에 들어선 94년 별안간 21번이나 베이스를 훔치는 '사건'이 있었다. 지난 9월 3일 그와 전화 연결이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물은 것이 그 사연이었다. 그는 반 호흡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20-20을 한 번 해보려고 그랬죠. 뭐 해놓은 것도 없고…. 홈런이야 언제든 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우선 도루부터 채워놓고 보자' 하고 도루 스무 개를 해놨는데, 결국 홈런이 모자랐죠."

"그렇군요. 그 해 홈런이 15개에서 멈췄죠?"

"15개? 15개로 기록이 돼있습니까? 나는 18개쯤 했다고 생각했는데…."

4번 타자 김민호의 '자갈치 타법'

▲ 김민호의 선수 시절 모습. / ⓒ 롯데 자이언츠 홈페이지


대학시절부터 4번을 치기는 했지만, 김민호는 '슬러거'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는 왼손타자면서도 밀어치는 스타일로 총알 같은 타구를 좌중간으로 날리는 중거리 포에 가까웠다.

100m를 12.3초에 주파하는 발도 빠른 편이었고, 1984년 그가 입단한 자이언츠는 아직 김용희와 김용철의 '용용포'가 교대로 4번을 나누고 있었다. 아직 주전으로 성장하지 못한 김민호는 하루건너 하루나마 2번이나 7·8번쯤에 기용되곤 했다.

그러나 백업 1루수로 간간히 나서던 그가 신임감독 어우홍의 지원 아래 주전 1루수와 4번이라는 중책을 맡기 시작했던 88년부터 그는 스스로를 4번 타자로 다듬기 시작했다.

경기흐름을 끊거나 부상의 우려가 있는 도루나 무리한 주루플레이를 자제했고, 타점을 만들어내는데 집중했다. 오랜 세월 밀어치는 습관이 배어있던 오른 손목을 꺾어 강하게 당겨 치는 타격을 위해 그만의 타격 폼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 무렵부터 그는, 투수가 투구동작에 들어가는 순간 방망이를 밑으로 내려 홈플레이트를 건드리는 듯한 예비동작을 시작했고, 그와 함께 한쪽 다리를 들었다가 내디디며 몸을 축으로 공을 당기며 체중을 실어 날렸다. 마치 몸의 한 부분인 듯 단단하게 휘돌려진 방망이에 맞은 공은 순간적으로 중계화면에서 사라졌고, 순식간에 우익수와 중견수 사이를 면도날처럼 가르곤 했다. 

열정의 자갈치, 1992년 정상에 서다

88년, 90년, 91년, 꾸준히 3할대 타율과 두 자릿수 홈런, 그리고 60~70개 안팎의 타점을 만들어내며 김용희와 김용철의 대를 잇는 자이언츠의 4번 타자로 자리 잡은 그가 가장 화려하게 빛났던 것은 92년이었다.

그 해, 19세의 신인 염종석이 터줏대감 윤학길과 나란히 17승을 올리며 시즌을 이끌었고, 포스트시즌에서는 박동희가 혜성처럼 타오르며 마지막 한 발의 진군을 독려했다. 타선에서도 신인 급의 전준호·이종운·김응국·박정태가 나란히 3할 대 방망이를 휘두르며 부산 팬들에게 벼락같은 환희를 안겨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 해 팀의 중심은 .322의 타율에 16개의 홈런과 88개의 타점을 때려내며 차곡차곡 승기를 꽂아온 '남두오성(南斗五星 ; 그 해, 팬들이 전준호·이종운·김응국·박정태와 김민호를 합쳐 부른 애칭)'의 가장 큰 별 김민호였다. 

유난히 결정적인 승부에 강했던 그는 우승의 길목에서도 결정적인 한 방을 책임져주곤 했다. 단기전의 절대강자 해태 타이거즈와 맞섰던 플레이오프 5차전 1회초 첫 타석에서 상대선발 문희수로부터 빼앗아냈던 석 점짜리 결승 선제홈런이나, 이글스와의 한국시리즈 1차전 1회에 기선을 제압했던 선제 2타점 적시타는 그 대표적인 순간들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다.

▲ 자이언츠 코치 시절의 김민호. / ⓒ 롯데 자이언츠 홈페이지

 

그 해 정규시즌 3위에 그치고도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를 거쳐, 다시 한국시리즈를 정복한 자이언츠의 경기를 보면서 '고교야구선수들 같다'는 표현을 한 이가 있었다.


때로는 혈기가 넘쳐 경기를 망치는 경우가 없지 않았지만, 마치 한 경기라도 지면 시즌이 끝난다는 듯 사생결단을 하고 달려들어 악을 쓰고 환호성을 올리는 모습에서 풋풋하기까지 한 열정이 넘실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시즌 내내 더그아웃에서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지 못하고 악을 쓰고 박수를 치고 침을 튀기며 허공으로 주먹질을 해댄 이가 김민호였다. 도무지 귀가 아파 더그아웃에 앉아있어도 자갈치시장에 와있는 듯하게 만든다는 그에게 일찌감치 신인시절부터 선배들이 붙인 별명이 '자갈치'이기도 했지만, 그는 목청으로, 다시 방망이로 후배 선수들에게 투지와 자신감과 사명감을 심어주는 팀의 중심이었다.

근성의 4번 타자, 박수칠 때 떠나다

▲ 자이언츠 코치 시절의 김민호. / ⓒ 롯데 자이언츠 홈페이지


그러나 1995년. 다시 한 번 끓어올라 우승 목전까지 밀고 올라가며 숱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냈던 그 해, 자이언츠에서 김민호의 모습을 보기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10년 가까이 당연한 듯 그가 지켜왔던 4번, 그리고 1루수 자리에는 마해영이라는 훤칠한 젊은이가 대신 들어서있었고, 그런 풍경의 어색함마저 금세 새 4번 타자가 펑펑 때려내는 홈런포의 환희에 가려지고 흐려졌다. 

"크게 부상이라든가 뭐 그런 게 있었던 건 아니고…, 말하자면 세대교체 과정에서 그렇게 된 거죠. 그 때 좋은 신인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마)해영이하고 (임)수혁이, 또 지금은 삼성에 가있는 (김)종훈이, 그런데 그 녀석들 보니까, 그냥 되겠다 싶기도 했고….'

"후배들에게 양보하는 마음도 있었다는 말씀이신가요?"

"글쎄…, 뭐 사실 제 목표는 40살까지 선수생활 하는 것이긴 했는데, 또 그 녀석들 보면서 다른 생각을 좀 하게 된 것도 있었죠. 그동안 팀에 좋은 1루수 신인들이 많이 들어왔었거든요. (임)경택이, (박)상국이, 또 195cm짜리 대형선수였던 유충돌이. 뭐 그런 친구들이 결국 나 때문에 사장된 셈이기도 한데, 이제 정말 때가 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러면서 이제 지도자로 다시 출발하는 것도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박수 쳐줄 때 떠나자는 생각을 한 거죠."

자신은 있었다지만, 아무래도 자기 생각보다 조금씩 느려지던 서른다섯 줄의 방망이. 또 '미스터 롯데'의 위세에 눌려 날개도 펴지 못하고 흘러가버린 후배들에 대한 미안함, 이제 나타난 자신보다 나을 수 있는 후배에 대한 믿음과 새 출발에 대한 의지. 그는 선수생활의 마무리와 지도자생활의 준비를 시작했고, 44경기에만 얼굴을 비친 이듬해 1996년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정리했다.

그가 남긴 기록, 106개의 홈런과 .278의 통산타율, 그리고 606 타점. 좋은 성적이지만, 올스타전 MVP를 한 번 차지한 것을 제외하면 정말 말년에 20-20이라는 훈장이나마 욕심이 났을 만큼 두드러지는 고비가 없는 성적이다. 그의 시대를 주름잡았던 장종훈이나 김성래과 비교해보자면 더욱 초라해지는 면면이며, 그래서 그에게 '8개 구단 중 가장 빈약한 4번 타자'라는 비아냥을 보내는 이 마저도 있었다.

그러나 골 넣는 골키퍼를 가진 축구팀이 결코 최강의 자리에 서기 어렵고, 외곽슛을 펑펑 터뜨리는 센터를 가진 농구팀이 승리하기 어려운 법이다. 마찬가지로 야구에서라면 성적과 기록에 앞서 적절한 고비에서 태산처럼 버티며 투지와 자신감의 근거가 되어주어야 하는 것이 4번 타자다. 그래서 자신의 자리를 정확히 알고 그것에 맞추어가려고 했던 4번 타자, 그래서 다른 팀의 누구에게 힘과 재능으로 앞설 수는 없었을지라도 사명감과 근성으로써 동료들과 함께 전진했던 중심타자 김민호의 중량감은 역대 최고의 수준에 가깝다.

'끝'을 생각하지 않는 근성도, 아름다운 '끝'을 만들 줄 아는 슬기도 모두 귀하다. 그런데 그와의 전화통화를 맺으며, 그 두 가지가 사실은 아주 다른 것이 아닐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개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는 것은,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이기보다는 그 이전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 데서 원인을 찾아야 옳으니까 말이다.

 

김민호와 나눈 이야기, 몇 마디 더

 

- 앞으로 계획은?


"마흔 살 까지 선수생활을 해보겠다는 계획도 결국 바뀌지 않았나. 계획이란 게 큰 의미는 없는 것 같다. 그저 지금 조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할 것 같다. 지금은 부산고 감독이니까, 부산고를 전국대회 우승시키는 것이 목표이고 계획이다."

- 팬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요 몇 년 계속해서 하위권에 맴도는 자이언츠를 보면서 팬들도 많이 답답하실 것 같다. 그렇지만 좋은 신인들이 계속 들어오고 있고, 특히 투수들이 좋기 때문에 내년쯤에는 기대를 해봐도 좋을 것 같다. 돌아보면 92년, 정말 자이언츠는 신바람 나게 야구를 했던 것 같다. 요즘 트윈스가 신바람야구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사실 신바람야구 원조는 92년의 자이언츠가 아니겠나? 그 해의 신바람도 (전)준호, (박)정태, (염)종석이, (공)필성이 같은 좋은 신인들이 계속 모이면서 세대교체가 잘 됐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제 곧 정말 'again 1992'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좀 더 기다리고 지켜보시면 좋을 것 같다." 

 

김은식(punctum)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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