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살은 떨어지고, 창은 부러지고, 검은 이가 빠졌다. 더 이상 종이 한 장 베지 못하는 절망의 순간. 징그럽게도 몰아치는 적들이 메워버린 벌판 앞, 발끝부터 얼어붙는 절벽 끝에서 마지막 힘을 모아 고함을 지르며 적진으로 달려나가 끝내 고슴도치 같은 화살받이가 되어 절명하는 영웅의 뒷모습.
그것은 그 패배를 쉽게 기억에서 지워낼 수 없게 만드는 처절한 여운이며, 끝내 마지막 한 번 더 힘을 모아 기어이 이기고 싶다는 집념을 만들어내는 기억 속의 에너지원이 된다.
라이온즈에게 '플레이오프 5차전'은 씁쓸한 느낌을 떠올리는 단어가 된다. 자이언츠와의 1999년. 그리고 트윈스와의 1997년. 한 번은 안마당에서, 한 번은 적진에서 피어오른 화려한 축포 속에서 쓸쓸하게 무너져 내렸던 잔인한 조연의 추억 때문이다.
이만수·김성래·강기웅의 시대를 대책없이 흘려보낸 탓에 1997년 시즌 전 꼴찌 후보로까지 꼽혔던 라이온즈는 최익성(22개)과 이승엽(31개), 신동주(21개)를 비롯해 무려 165개의 팀 홈런을 때려낸 신세대 타선의 급성장에 힘입어 간신히 4위로 턱걸이를 하는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투수 놀음'이라는 야구판에서 믿을만한 투수진을 확보하지 못한 그들은 '재미있는 야구'를 할 수는 있었지만 '이기는 야구'를 보여주기에는 기운이 부족했다.
그 해 가을, 2승을 거둔 김상엽과 두 경기 연속 홈런을 날린 신동주의 활약으로 쌍방울 레이더스와의 준플레이오프를 통과해서 맞선 것은 바로 운명의 상대 LG 트윈스였다. 이전까지 그다지 얼굴 붉힐 관계는 아니었던 두 팀이 단숨에 '숙적'의 관계가 된 데는 그 해의 특별한 인연이 가로놓여 있었다.
1997년 플레이오프, '숙적' 트윈스와 맞서다
▲ 김상엽 선수. / ⓒ 삼성 라이온즈 팬북
1997년 5월 3일부터 삼성과 맞선 대구원정 3연전에서, 트윈스는 정경배의 역사적인 연타석 만루 홈런을 비롯해 무려 17홈런 49실점을 허용하며 넋이 나가고 말았다.
어이없는 3연패 후 트윈스의 천보성 감독은 즉각 '압축배트' 의혹을 제기했고 '성질'로는 누구에도 지지 않는 라이온즈 백인천 감독이 곧장 육두문자로 맞섰다.
서로 도덕성을 깎아내리는 최악의 감정싸움으로 한 달여를 맞선 끝에 사태는 결국 애매하게 봉합되었지만, 트윈스와 라이온즈는 새삼 앙숙으로 떠오르며 그 시즌 내내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그 대결의 결정판은 플레이오프였다.
플레이오프는 시작하자마자 트윈스의 일방적인 페이스로 흘러갔고, 라이온즈는 구석으로 몰리고 말았다.
1차전에서는 김한수가 석 점짜리 역전홈런으로 분위기를 잡았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유지현에게 만루 홈런을 맞으며 무너졌고, 2차전에서는 1차전에 선발등판 했던 성준을 다시 마무리로 투입하는 무리수에도 불구하고 서용빈에게 끝내기안타를 얻어맞고 말았다. 많은 이들이 '역부족'이라는 말을 떠올리는 순간이었다.
라이온즈가 마지막으로 던질 수 있는 승부수, 아니 마지막으로 매달려볼 수 있는 최후의 카드는 김상엽이었고, 그 해 정규리그 12승으로 팀을 이끈 데 이어 쌍방울과의 준플레이오프에서도 이미 2승을 올렸던 그는 '신바람'을 타고 몰려드는 트윈스의 거센 공격을 7이닝동안 5안타 1실점으로 막아냈다.
그 수훈 덕에 간신히 1승을 올리며 한 숨의 여유를 얻은 라이온즈는 4차전에서 최익성의 역전결승 3점 홈런에 힘입어 간신히 승부의 추를 다시 가운데로 옮겨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하루건너 잠실에서 열린 마지막 5차전. 결국 모든 것을 걸어야 했던 그 마지막 결전에서 라이온즈가 기대할 수 있는 것 역시, 오로지 김상엽이었다.
김상엽은 김상엽이었지만...
라이온즈는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선두타자로 나선 최익성이 트윈스 선발 임선동으로부터 홈런을 뽑아내며 승기를 잡기 시작했다. 그 해 주전 자리를 잡자마자 20-20을 달성하며 장타력까지 겸비한 새로운 유형의 톱타자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최익성의 3차전부터 시작된 플레이오프 3경기 연속홈런이었고, 이어진 양준혁의 적시타로 두 점을 앞서나갈 수 있었다.
거듭된 무리, 그리고 다시 14일의 선발등판 이후 사흘 만에 선발로 나선 김상엽은 극도로 지쳐있었다. 직구의 스피드도, 커브의 각도와 '파워'도 전 같지 않았다. 게다가 포수 김영진도 영 뻣뻣한 미트질로 곡예를 부리며 불안함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연달아 주자를 내보내고 패스트볼과 도루로 진루를 허용하고 만루의 위기를 맞았지만, 끝내 '김상엽은 김상엽'이라는 듯 마지막 한 명의 타자를 잡아내며 진땀을 닦아댔고, 그렇게 이어진 경기가 6회말에 이르고 있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무실점이었고, 두 점을 앞서고 있었다.
6회 말, 트윈스의 선두타자는 라이온즈에서 유니폼을 갈아입은 동봉철이었다. '센스'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그는 옛 동료 김상엽의 진땀과 몰아쉬는 호흡을 간파했고, 허를 찌르는 기습번트를 성공시키며 급소를 찔렀다.
김상엽은 고개를 떨어뜨렸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공은 전병호의 손으로 넘겨졌고, 팬들은 심호흡을 했다. 무사에 주자를 하나 남겨놓았지만, 아직 두 점을 앞서고 있고 경기는 절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마지막 네 번의 이닝만 넘겨준다면. 그래서 어떻게든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따놓고 다시 며칠의 휴식을 취한다면, 그 사이 회복할 김상엽을 앞세워 이제는 선동열이 없는 타이거즈와 제대로 한 판 승부를 내볼 수 있으련만.
그러나 전병호를 시작으로 성준까지. 1루에 나가있던 선두타자 동봉철이 홈을 밟은 후 다시 타석에 서서 3번째 아웃카운트가 되는 뜬공을 우익수 양준혁의 머리 위로 띄워줄 때까지, 이제 김상엽이 사라진 라이온즈의 마운드는 악몽 같은 뭇매를 맞고 또 맞아야 했다.
안타, 안타, 보내기번트, 패스트볼, 안타, 도루, 다시 안타, 실책, 안타, 안타, 안타, 도루, 또다시 안타.
무려 8연속타수 안타의 플레이오프 신기록 작성이었고, 라이온즈는 트윈스 타자들이 보내기번트와 주루사로 버린 두 개의 아웃카운트와, 동봉철의 뜬공 한 개를 주워 비참하게 그 길고 길었던 6회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김상엽은 더그아웃 깊숙한 곳으로 자리를 피했고, 라이온즈의 97년도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리고 '에이스' 김상엽의 모습도,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외로운 영웅의 필살기, '파워 커브'
▲ 김상엽 선수. / ⓒ 삼성 라이온즈 홈페이지
어쩌면 그것은 그의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대구고였다. 대구고는 강기웅부터 이범호까지, 제법 재능 있는 선수들을 배출해왔지만 전국무대에서 강자 소리를 듣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그러나 1987년, 메이저급 대회는 아니지만 대붕기에서 대구고가 우승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해 3학년으로 마운드의 에이스였던 김상엽은 거의 매 경기에 등판해 세광고·동산고·경북고와 부산고 같은 강자들을 꺾으며 최우수선수로 선정된 데 이어 타점상·수훈상을 독식한데다가 타격순위에서도 3위에 오르며 '북치고 장구치는 선수'로 화제에 올랐었다.
그리고 고교졸업 후 곧바로 들어선 프로무대. 삼성 라이온즈는 물론 언제나 강팀이었지만, 그 무렵 김시진과 김일융의 시대를 보낸 데 이어 전설적인 마무리 권영호마저 은퇴하며 앞뒤로 텅 비어버린 허약한 투수진의 팀이었다.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물론 라이온즈에 좋은 투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부시맨'이라는 별명의 재일교포 김성길은 한 몸으로 한 시대를 버텨낸 철완이었고, 성준과 박충식도 모두 한 때 프로야구 판을 떠들썩하게 만든 투수들이었다. 김태한과 이태일도 수준급의 투수였다.
그러나 '짧고 강하게 타오르는' 자이언츠가 그랬듯, 중간과 뒷문이 부실한 마운드는 돌발적인 상황에 취약했다. 선발진중 누구 하나라도 부상으로 이탈하는 날이면, 성급한 승리지상주의의 해악은 투수진 전체를 덮쳐 왔고, 결국에는 줄부상과 줄퇴출이라는 악순환이 반복되곤 했다.
1989년, 190㎝ 가까운 키에 100㎏ 가까운 체중의 당당한 19살 청년을 발견한 미국인 코치 마티는 비장의 무기 '파워 커브'를 전수했고, 김상엽은 한 해 내내 그 구질을 갈고 닦았다. 김상엽의 좋은 체구, 그리고 강한 손목힘과 손가락 힘이, 마티가 그동안 보아왔던 다른 한국선수들과는 다른 조건이었고, 김상엽의 성실한 태도는 코치조차도 보지 못했던 강점으로 작용했다. '김상엽의 파워커브'라는 역사적인 구질은, 그렇게 태어났다.
파워커브는 웬만한 투수의 직구과 구별하기 쉽지 않은 시속 130㎞대 중반의 속도로 약간 높은 코스로 들어오다가 바닥 쪽으로 수직으로 떨어졌다. 그러면 타자들은 커브도 아니고 슬라이더도 아닌, 그렇다고 직구도 아닌 생소하고 힘 있는 공에 맥없이 방망이를 휘저어대곤 했다. 그래서 그는 실질적인 데뷔시즌인 1990년에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곧장 12승과 18세이브를 올렸고, 2.81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물론, '선발과 마무리를 오갔다'는 것은 대개의 경우 '혹사'와 같은 말이다. 더구나 그는 신인이었다. 의욕과 흥분을 다스릴 경험이라는 것이 그에게는 없었다. 따라서 90년의 대활약은 필연적으로 1991년과 1992년의 부진으로 이어졌고, 두 해 동안 6승과 8승으로 내려앉은 그는 조금씩 경험과 내공을 쌓으며 안으로부터 다져 올린 뒤에야 '에이스'로 올라설 수 있었다.
김상엽에게 붙는 수식어, '격년제 에이스'
1993년은 김상엽이 라이온즈의 에이스로 올라선 해였다. 그 해, 181.1이닝을 던지며 그가 기록한 평균자책점은 2.58이었고, 13승 8세이브와 함께 무려 170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탈삼진왕 타이틀도 차지할 수 있었다.
이선희와 김시진을 비롯해, 라이온즈 투수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눈물을 쏟는 비극적 조연의 단골배우였다. 그러나 김상엽은 예외적으로 큰 경기에 강했다.
그는 1992년과 1993년, 2년 연속으로 개막전 완봉승을 거두는 등 개막전에서만 5승 1패를 거두었고, 포스트시즌에서도 1997년의 3승을 비롯해 7승을 올린 투수였다. 그래서 단순히 능력치가 높은 투수가 아닌, '팀 마운드의 심리적 중심'을 가리키는 말이 '에이스'라면 라이온즈에서 김상엽의 앞에 놓일 선수가 많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맞혀 잡기보다는 삼진으로 잡는 스타일이었기에 항상 투구수가 많았고, 뒤를 책임져줄 믿음직한 동료 투수는 없었다. 그런 상황은 어쩔 수 없는 무리를 반복해서 강요했고, 한 시즌의 성공은 필연적으로 한 시즌의 부진을 불러왔다.
1994년의 2승. 그리고 1995년의 17승과 1996년의 3승. 다시 1997년의 12승과 1998년의 3승.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격년제 에이스'라고도 불렀고, '홀수 해에만 던지는 투수'라고도 불렀다.
▲ 하이파이브 포수 이만수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는 김상엽 선수./ ⓒ 삼성 라이온즈 팬북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해마다 잘 던지지 '못했던' 것보다는 한 해 주저앉고도 반드시 재기해 해마다 다시 '돌아오는' 투수였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는 90년대 내내 네 번이나 주저앉고도 다시 돌아와 또다시 동료와 팬들에게 희망을 던지는 에이스였다.
하지만 잔매가 더 깊숙이 골수에 쌓이는 법. 네 번째 10승대 투수에 올랐던, 그리고 끝내 마지막 한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또다시 한국시리즈 제패의 꿈을 놓쳐버려야 했던 1997년을 지낸 김상엽은 결정적으로 멍이 들어버렸다.
어깨도 성치는 않았지만, 1994년에 당했던 허리부상이 깊어진 탓에 1998년 불과 36이닝만을 소화하며 전력에서 이탈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라이온즈 팬들이 당연하다는 듯 화려한 복귀 소식을 기다리던 '홀수해' 1999년, 김상엽은 아예 개막 전부터 전력에서 이탈해 그 해 내내 단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했다.
그 해 말, 이만수가 떠난 뒤 커다란 공백으로 남아있던 포수자리에 당대 최고라 불리던 김동수를 FA로 영입하게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과 더불어 보상선수로 지명된 것이 김상엽이라는 비보가 전해졌다. 같은 해 역시 FA 이강철의 보상선수로 떠나보낸 15이닝 완투 투혼의 박충식, 또 한 해 전 임창용과 유니폼을 바꿔입고 떠난 양준혁과 함께 라이온즈 팬들의 마음에 짙은 그늘을 드리운 사건이었다.
2000년, 한 해 건너 트윈스의 마운드에 올라선 김상엽은 불과 6.2이닝을 던지며 두 번의 패전만을 기록하고 물러섰다. 12년, 11시즌의 길고 험하고 파란만장했던 싸움의 초라한 결말이었다. 파워커브라는 역사적인 구질로 한 세대를 풍미하며, 라이온즈의 허약한 마운드에 헌신적인 땀을 뿌렸던 한 명의 에이스가 트윈스의 쪽문으로 쓸쓸히 퇴장했던 것이다.
미안하다, 그립다
능력껏 뛰고 뛴 만큼 챙겨가는 곳이 프로스포츠의 무대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라면 서운하다. 비록 난타당하고 실책을 저지르고 경기를 망쳐 눈물을 흘린 형편없는 선수일망정, 팬들을 함께 울게 한 선수를 기억하고 곱씹어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것이 또한 프로스포츠의 매력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90년대 에이스'라는 요란한 수식어에 비하자면 초라한, 통산 78승의 투수 김상엽. 번듯한 은퇴식에서 기립박수 한 번 쳐주지 못한 것이 속에 맺히고 미안해지는 팬들의 마음 또한, 그 때문이 아니겠는가.
김은식(punctum)
오마이뉴스
[야구의 추억, 예순 두 번째] 베어스 정신의 밑거름, 김형석 (1) | 2022.12.21 |
---|---|
[야구의 추억, 예순 세 번째] 1992년을 뒤흔들었던 김민호 (0) | 2022.12.05 |
[야구의 추억, 예순 다섯 번째] '대도'의 원조 김일권 "무조건 뛰어라!" (0) | 2022.11.23 |
[야구의 추억, 예순 여섯 번째] 제주도가 낳은 돌하루방 투수, 오봉옥 (0) | 2022.11.23 |
[야구의 추억, 예순 일곱 번째] 김인호, 인천의 1번 타자 (0) | 2022.1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