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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추억, 예순 번째] 가장 '돌핀스 스럽던' 유격수 염경업

--김은식 야구

by econo0706 2023. 2. 9.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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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16 

 

82와 95, 84과 92, 90과 94. 저 두 개씩 묶인 숫자에 특별하게 반응하는 이들이 바로 프로야구 팬들이다. 그리고 가슴 아픈 일을 많이 겪었던 기구한 인천의 야구팬들에게 마찬가지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숫자가 있다면, 89와 94이다. 98에 앞서 말이다. 난수표처럼 늘어놓은 위의 숫자들은 베어스와 자이언츠, 그리고 트윈스와 돌핀스라는 야구팀들이 누렸던 영광의 해들을 가리킨다. 82년과 95년에는 베어스가 우승을 했고, 84년과 92년에는 자이언츠가, 90년과 94년에는 트윈스가 우승을 했다. 그리고 무려 다섯 개의 팀이름을 써내려가야 하는 인천팀이 우승한 것은 98년이 유일했다.

 

그러나 인천팬들에게 98보다 더 아름다운 기억이 89와 94다. 그 두 해는 '돈으로 산 우승'이라는 비난도, 또 우승 이듬해 팀으로부터 버림받은 연고지 팬들의 비참함도 떠올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 두 해에 오로지 포기하지 않는 투혼으로, 맨주먹으로 이뤄낸 멋진 도전의 기억은 비록 우승의 목전에서 좌절했던 눈물이었을지언정 98년의 우승컵 이상으로 소중하고 그리운 것이 되기 때문이다. 

 

짠물야구, '짠' 마운드와 '물' 타선

 

▲  94년 한국시리즈 진출을 확정한 돌핀스 / ⓒ 한국야구위원회


90년대 초반, 해마다 '탈꼴찌대전'이라는 참혹한 볼거리를 선사했던 밑바닥의 라이벌 레이더스와 돌핀스라는 팀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레이더스라는 팀이 '가진 것 없으면서도 겁없이 들이대는' 무서운 꼬마의 이미지를 떠올린다면, 돌핀스는 '코피에 곤죽이 되도록 짓밟히고도 끝내 항복 한 마디를 씹어 삼키며 버티는' 소심한 반항아를 떠올리게 했다.

 

김기태로 상징되는 공포의 왼손군단을 필두로 한 가공할 타선으로 자존심을 삼던 레이더스와 달리 돌핀스는 오로지 투수력에 의존하는 팀이었다. 박정현·최창호·정명원 트리오를 시작으로 김홍집과 정민태로 이어진 에이스 계보는 어느 바닥에 내놓아도 부족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무실점이면 승, 2실점이면 패'라는 가혹한 조건 탓에 대개 돌아보면 그들의 성적은 특별하지 못했다. 80·90년대 인천야구의 상징 '짠물야구'는 '짠' 투수진과 '물' 타선의 결합이기도 했다. 돌핀스가 수면 위로 솟구쳐 올랐던 89년과 94년 역시 투수들의 외끌이 투혼으로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나마 한 해 건너 한 해씩 실력을 발휘해준 김경기와 김동기를 제외하면, 타선은 한 시즌도 거르지 않고 꾸준히 밑바닥에서 제자리를 지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89년 박정현·최창호·정명원의 신인 3총사와 94년의 김홍집·정민태는 상대하는 팀의 강타선과 더불어 기다려도 터져주지 않는 자기팀 타자들에 대한 야속함과도 끈질기게 싸워야 했다.

 

그러나 좀더 세밀하게 살펴보자면, 94년과 89년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89년 팬들을 지배했던 느낌이 애처로움과 안타까움이었다면, 94년에는 조금 더 안정되고 단단한 느낌이 있었고, 89년에는 '설마 될까?'하는 의구심이 스스로에게 있었다면 94년에는 '어쩌면 될지도 몰라' 하는 자신감도 조금씩 스며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89년을 떠올리는 기억이 준플레이오프 3차전 9회초 마운드에서 쓰러진 박정현의 안타까운 투혼이었다면, 94년을 이끌어내는 것은 '돌핀스'라는 팀의 이미지다. 

 

수비야구를 통해 더 단단해진 짠물야구 

 

종합 3위로 마무리했던 89년에 비해 94년, 돌핀스는 2푼이나 높아진 승률을 기록하며 한 단계 높은 준우승까지 올라설 수 있었다. 그러나 팀타율은 0.249로 전체 6위였던 89년에 비해 오히려 5리가 떨어지며 꼴찌로 추락했고, 팀평균자책점도 3.03으로 전체 1위였던 89년보다 훌쩍 높아진 3.50으로 4위에 머물렀을 뿐이었다. 공수 양면에서 나아지기는커녕 조금씩 후퇴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 부분에서 뚜렷이 좋아진 것이 있었다. 89년보다 6경기나 더 치르면서도 무려 27개나 줄어든 84개의 팀실책(전체 1위)이었다. 평범한 내야 파울플라이를 잡지 못한 채 던진 다음 공으로 홈런을 맞는 투수들이 많다. 혹은 '스트라이크 낫아웃'으로 삼진을 당한 채 출루에 성공한 유령주자가 끝내 홈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많다. '퍼펙트 게임'이라든가 '노히트노런' 같은 기록이 깨지는 순간, 오히려 패전의 위기에 몰리는 경우가 종종 일어나는 것 역시 다르지 않은 과정이다. 근육의 물리적 작용 이상으로 심리적인 규정을 받는 투수들을 결정적으로 흔드는 것은 바로 등 뒤에서 튀어나오는 칼침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돌핀스는 투수력이 강한 팀이었다. 그러나 실점이 많은 팀이었다. 바로 허약한 수비 때문이었다. 그러나 94년 돌핀스의 타자들은 비록 상대 투수를 향해 그 칼끝을 제대로 겨누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자기 팀 투수들을 찌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안정 속에서 공을 던진 투수들은 결정적인 한 점의 갈림길에서 끝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고, 최고의 마무리 정명원의 힘과 상승하며 경기 후반에 더 강한 팀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짠물수비의 핵, 염경엽

▲  2000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유니콘스. 가운데 안경 쓴 이가 염경엽./ ⓒ 한국야구위원회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유격수로 김재박·유중일·이종범, 그리고 박진만 중 누구를 꼽는가 하는 것은 거의 전적으로 그 사람의 세대와 취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 네 선수라면 각기 조금씩 남고 모자라는 면면이야 있겠지만 종합적인 평가로서 쉽사리 우열을 가릴 수 있는 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듣는 이의 절반쯤은 비웃을 것으로 각오를 하고 마음 속에 품었던 생각을 말해보자면, 그 네 사람에 염경엽을 더해 다섯 명으로 '수비 시합'을 시킨다면, 염경엽이 절대 꼴찌는 아닐 것이라는 확신을 나는 가지고 있다.

 

물론 '화려함'이라는 면에서 염경엽이 명함을 내밀 처지가 아님은 분명하다. 이미 반 쯤은 외야로 뚫고 나가는 타구의 뒷덜미를 잡아채는 표범 같은 다이빙캐치, 그리고 순식간에 일어나 총알 같은 송구로 1루수의 글러브를 정확히 파고들어 반의 반걸음 늦게 베이스를 밟은 타자가 머리를 감싸 쥐게 만드는 순간, 그래서 '그림 같다'는 말뜻의 실감을 선사하며 양쪽팀 응원단 모두에서 일치된 탄성을 끌어냈던 김재박과 이종범의 플레이야말로 웬만한 홈런 몇 개와 바꾸지 않을 야구의 매력,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평범한 것 한 두 개쯤 놓치더라도 결정적인 것을 잡아내 벌충하면 된다고 생각해도 좋은 강팀의 유격수에게나 어울리는 여유인지도 모른다. 혹시 다른 팀보다 훨씬 가벼운 방망이를 쓰는 것이 아닌가 싶었던 허약한 타선에서 한 점이라도 내 줄 때까지 끝내 버텨야 했던 돌핀스 수비에서, 그렇지 않아도 울고 싶은 투수들이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공 한 개라도 더 집중해서 던지도록 떠받쳐야 했던 야수에게 중요한 것은 '보는 사람 힘빼지 않는' 깔끔한 수비였다. 94년, 타이거즈의 2년차 이종범은 시즌 내내 4할을 넘나드는 타격 솜씨와 함께 신들린 듯한 수비실력으로 스포츠뉴스의 첫 소식과 마지막 명장면을 도맡았다.

 

그에게 보낼 독창적인 찬사를 만들기 위해 모든 야구해설가들을 문학 소년으로 만들었던 최고의 유격수인 그가 저질렀던 실책은 27개였다. 그러나 그 해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돌핀스 유격수 염경엽의 실책은 단 8개였다. 그 해, 이종범은 그를 향한 타구가 날려질 때마다 명장면을 기대하게 하는 선수였다. 그러나 염경엽은 자신을 향해 타구가 날아갈 때마다 팬들로 하여금 반사적으로 아웃카운트 하나를 셈하게 하는 선수였다. 94년 돌핀스 내야진의 핵은 염경엽이었고, 그가 만들어낸 미묘한 변화에서 비롯된 '돌풍'은 준우승이라는 '태풍'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통산 1할대 타자, 완전한 '반쪽' 

 

▲  구단 운영팀 직원 시절, 도쿄돔을 방문한 염경엽 / ⓒ 현대 유니콘스

 

96년 팀은 현대로 옷을 갈아입었고, 신인 시절 잠시 같은 포지션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김재박이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염경엽의 모습은 그라운드에서 사라졌다. 인천고를 졸업한 박진만이 들어와 김재박의 등번호 '7'을 물려받았고, 실수도 적지 않았지만 스승 김재박을 떠올리게 하는 '센스'와 2할 8푼대의 옹골찬 방망이로 유격수 자리를 접수했기 때문이다. 이듬해, 박진만이 2년차 징크스를 심하게 앓으며 역대 최저타율(0.185) 신기록을 세우는 동안에도 염경엽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염경엽의 방망이라 한들 그것보다 나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96년과 97년, 주로 대수비와 대주자로 간간히 그라운드를 밟은 염경엽에게 간혹 부득이한 타순이 돌아가기도 했지만, 128경기, 32번의 타수가 주어진 그 두 해 동안 그는 단 한 개의 안타도 때려내지 못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가 가장 많은 안타를 때렸던 94년 역시, 그의 성적은 규정타석을 채운 모든 타자 중 마지막 순번이었다. 그리고 10년간의 개인 통산타율 역시 2할을 넘기지 못했다. 흔히 '반쪽짜리 선수'라는 표현을 쓰지만 염경엽처럼 완벽하게 반쪽으로만 존재하는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타선에서 그는 투명인간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사실 원래 그는 꽤나 '재능있는' 타자였다. 청소년대표팀을 오갔던 광주일고 시절을 거쳐 고려대에서 3번을 치며 단기리그 타격상도 심심치 않게 받았던 아마추어 시절, 타격에서 그의 재능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빈약한 체구와 체력, 그리고 소심한 성격은 결국 나무배트와 변화구에 대한 적응을 어렵게 만들었다. 소리없이 팀의 전성기를 떠받쳤던 한 재능있는 유격수는, 그렇게 별다른 부상도 없이 사라져갔다. 물론 주목받지 못한다 해서 지레 손을 털 리 없는 잡초였기에 눈에 띄지 않는 동안에도 그의 몸은 분주했다.

 

팀이 한두 점 앞선 경기 종반이면 감독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대수비 요원이 그였고, 그는 그런 기약 없는 부름을 위해 유격수·2루수·3루수, 혹은 외야수까지 수비훈련을 했고 또 나가서 한 순간을 질주했다. 그리고 타격에서도 특별한 한 순간의 대타로서 쓸모를 만들기 위해 빠른 발을 이용할 수 있는 스위치히터로의 변신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재박과 박진만이라는, 전설적인 두 명의 유격수가 주고 받은 계보 틈바구니에서 더 이상의 기회를 가지지 못한 그는 2000년을 끝으로 그야말로 '가늘고 길었던' 10년의 선수생활을 접어야 했다. 2001년 4월 5일. 수원 개막전에서 그를 위한 은퇴식이 거행되었다. 물론, 사람들은 그날을 대투수 정명원의 은퇴식으로만 기억했다. 아마도 정명원이라는 대스타를 위한 행사에 더불어 한 자리를 붙이지 않고는 허락되기 어려웠을 영예이기도 했다. 

 

아름다운 꼴찌, 조용하게 바쁜 잡초 

 

▲  올 시즌, 1군 수비코치로 선임된 염경엽 / ⓒ 현대 유니콘스 홈페이지

 

원래 꼴찌는 응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진지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돌핀스도 어찌 보면 많은 팬을 가진 팀이었다. 그러나 돌핀스라는 팀을 가장 많이 닮았던 염경엽이라는 선수의 이름에서 깊은 감상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돌핀스를 사랑했던 사람은 아마 아닐 것이다. 염경엽은 결코 1등이 아니었고, 심지어는 기필코 1등이 되고 말겠다고 발버둥친 선수도 아니었다. 그러나 밑바닥에서 나름대로 치열하게 흘린 땀방울은 흔히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기름진 거름으로 뿌려졌다. 그래서 94년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투수들을 떠받치고 팀을 준우승으로까지 밀어올렸고, 스타플레이어가 아니었기에 은퇴 후 걸었던 구단 직원의 길에서 해마다 훌륭한 외국인 선수들을 가려내 1차지명권이 없이도 팀이 꾸준히 상위권을 지킬 수 있게 했던 것도 그렇다.

 

그리고 자신의 은퇴식 날 이제 필요가 없게 된 야구용품을 팔아 마련한 500만원을 한 해 전 쓰러진 대학후배 임수혁 선수를 위한 성금으로 내놓으며 주변의 관심을 환기시켰던 일에서도, 우리는 새삼 그의 공로를 발견하게 된다. 올해, 유니콘스의 김시진 감독은 지도자 경험이 전혀 없는 그에게 1군 수비코치의 대임을 맡기는 파격을 단행했다. 망한 지 3년이 이미 넘어가고 있는 부잣집 현대의 상황이, 어느새 돌핀스의 90년대 초반을 닮아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여느 해보다 일찍 닳아버린 투수들의 어깨 또한 불투명한 팀의 미래와 더불어, 내야진에 큼직하게 뚫려있는 수비의 구멍들 탓이 적지 않을 것이다.

 

'돌핀스 유민'을 자처하는 내가, 드물게 배정되는 유니콘스의 경기 중계를 빼먹지 않으려는 이유는 사실, 이숭용과 김수경 때문이라기보다는 염경엽 코치 때문이다. 이따금 경기가 꼬여갈 때마다 비치는 더그아웃 풍경 한 구석에서 제 잘못인 듯 작은 미간을 구기고 있는 그의 얼굴이, 지고 또 지는 나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껄끄러움 없이 한 팀을 응원하는 것으로 상쾌하고 개운했던 도원야구장의 한 철을 참 그립게 만들기 때문이다.

 

김은식(punctum)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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