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개를 아느냐고 할 때 "오, 그 사람, 잘 알고 말고. 나하고는 막역한 사이지. 거 학창시절엔 그렇고 그런 친군데…"하면서 자기만큼 그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는 듯이 으시대는 사람이 간혹 있다.
그러나 남을 이해한다는 것처럼 어려움이 또 있을까. 다양하고 미묘한 심층(沈層)을 지닌 인간을 어떻게 다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인간은 저마다 혼자다. 설사 칫솔을 같이 쓸만큼 허물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결국 타인이다.
그러니까 아무개를 안다고 할 때 우리는 그의 나타난 일부분밖에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데서 우리는 불쑥 그와 마주칠 때가 있다. 길가에 무심히 피어 있는 이름모를 풀꽃이 때로는 우리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듯이.
필자는 적연선사(寂然禪師)를 생전에 뵌 일이 없다. 필자가 입산하기 전에 선사는 이미 사바세계에서 인연을 거둔 뒤였기 때문이다. 시은(施恩)을 가볍게 하기 위해 항상 누더기를 걸치고 생식(生食)을 했다는 선사, 하루 세 시간밖에 잠을 안 자고 참선만을 했다는, 그리고 평생토록 산문(山門) 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는 그가 어떤 분인지 남들이 전하는 말만 듣고서는 도무지 그 상(像)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 스님이 머물던 암자에 갔을 때였다. 거기서 나는 뚯밖에도 선사와 마주쳤던 것이다. 한 문도(門徒)가 간직하고 있는 유물을 보고, 문득 선사의 걸걸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서글서글한 눈매며 늘씬한 허위대까지도 역력히 보았던 것이다. 이러듯 선사와 상면(相面)하게 된 계기는 줄이 다 해진 거문고와 손때가 밴 퉁소에세였다.
그때까지 나는 선사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기 없는 고목처럼 꼬장꼬장한 수도승(修道僧), 인간적인 탄력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카랑카랑한 목소리, 일에 당해서는 전혀 타협을 모르는 고집불통이었으리라고. 그런데 암자 한구석에 세워둔 거문고와 그 위에 걸린 통소를 보고 그의 인간적인 여백과 마주쳤던 것이다.
암자 곁 커다란 반석에 앉아 땀을 들이고 있었다. 솔바람소리를 타고 상상의 날개가 펼쳐졌다. 청명한 달밤, 선사는 거문고를 안고 나와 선열(禪悅)을 탄다. 향기로운 차를 달인다. 걸걸한 목청으로 회심(回心)의 가락을 뽑는다. 반석 위에 뽀르르 다람쥐가 올라온다. 물든 잎이 시나브로 진다.
그는 찬바람이 감도는 율승(律僧)이 아니었을 것이다. 경전의 구절이나 좌선(坐禪)에만 집착하는 시시콜콜한 도승(道僧)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날의 상면(相面)으로 인해 나는 생전에 일면식도 없던 선사에게서 훈훈한 친화력(親化力) 같은 걸 느끼게 되었다. 물론 내 나름으로 알고 있는 그의 한 단면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와 그렇게 마주쳤던 것이다.
1970년 6월 16일
法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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