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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靈魂의 母音] 굴신운동(屈伸運動)

山中書信

by econo0706 2007. 2. 11.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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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참회는 우리들 인간의 내면생활 가운데서도 가장 승화(昇華)된 정신적인 현상이다.
 
자신의 현재와 지나온 자취를 되돌아보고 뉘우쳐 다시는 더 허물을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일은 막힌 인간 통로(通路)를 열어주는 재생(再生)의 문이다. 
 
아무리 몹쓸 죄인일지라도 그가 참회의 눈물을 흘릴 때 그에겐 차마 돌을던질 수 없다. 이제 새로 움트려는 어린 싹을 보고 누가 감히 짓밟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참회의 속성에는 어린이의 순수가 있어야 한다. 자신의 허물을 표백(表白)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저 연두빛 발아(發牙) 같은 순수가 있어야 한다.
 
근데 몇몇 사원에서 종풍(宗風)처럼 떨치고 있는 참회의 열의를 볼 때마다 흐뭇함을 느끼는 한편 참회의 본뜻을 생각할 때 의구심 같은 것이 없지도 않다. 참회라고 하면 절(禮拜)을 연상하리만큼 예배와 참회가 동일시되고 있는 경향인데, 예배는 참회하는 방법 중의 하나이지 그것이 곧 참회의 전부는 아니다.
 
흔히 불전(佛前)에서 몇자리의 절을 했다고 해서 무슨 기록의 보지자(保持者)처럼 으시대는 걸 본다. 어느 스님한테 가서 며칠동안 몇만 배 하고 왔다느니, 절을 하고 나니 얼굴이 예뻐지고 재수가 좋아지고 무슨 병이 낫고 어쩌고저쩌고.
 
이런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참회한 사람은 아니다. 참회인은 겸허하고 순수해야 한다. 그런데 전에 없던 상(相)이라는 루우즈가 입술에 발린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절하는 동작 또한 가관이다. 몇시간 동안 몇천 배(拜)를 채우겟다는 기록의식에서인지, 아니면 최면(催眠)상테에서 그런지는 몰라도 숨가쁘데 굴신운동(屈伸運動)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필이면 부처님 앞에서 그토록 가벼운 동작으로 굴신한단 말인가.
 
예배란, 더구나 참회의 예배란 간절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므로 어디까지나 그 동작이 공손하고 진중해야 한다. 그리고 예배의 의미는 널리 모든 중생을 공경하는 데에 있는 것이지 어떤 특정한 공간이나 시간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른 아침 누가 시키지 않아도 몸소 묵묵히 행길을 쓸고 있는 이웃들의 모습에서 차라리 우리는 '참회인의 상(像)'을 보게 된다. 그는 기록의식도 최면에도 걸림이 없이 만인이 다니는 길을 무심히 무심히 쓸고 있을 뿐이다.
 
1968년 1월 14일
 
法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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