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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농구] ⓶ 35일 간의 미국 전지훈련

--유희형 농구

by econo0706 2022. 11. 10.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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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26.

 

농구선수로 꿈에 그리던 국가대표 선수가 된 것이 고교를 졸업한 1967년 말이었다. 정말 기뻤다. 가난 때문에 고려대의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하고, 동기생 3명과 함께 전매청팀에 입단했다. 일류 대학 진학을 포기한 것에 서운함도 있었다. 아픔을 이겨내는 길은 우리나라 최고의 선수가 되는 것이다.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하고 이를 악물고 개인 훈련에 매진했다. 서울 삼선교에 방을 얻어 새벽 5시에 일어나 산을 뛰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꼬박 1년을 뛰고 나니 서전트 점프가 20cm 늘었고, 덩크 슛까지 할 수 있었다. 그러한 노력 때문인지 만 19세에 올림픽 대표선수가 되었다. 연세대, 고려대 출신이 아니면 대표선수가 되기 어렵던 시절, 유일하게 비 연·고대 출신이 뽑힌 것이다. 대표팀에서 유일한 말단 선수였다. 당연히 궂은일은 모두 내 차지였다. 가난했던 시절 훈련시간이 되면 챙길 게 많았다. 농구공, 수건, 물 주전자, 작전판 등 양손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러던 중 멕시코올림픽(1968년 10.12-27)을 대비한 해외 전지훈련 계획이 발표되었다. 68년 1월 28일부터 3월 2일까지 35일간 미국 서부지역에서 대학팀 등과 17경기를 갖는 일정이었다. 선수단은 13명(임원 3명, 선수 10명)으로 구성되었다. 선수가 엔트리 보다 2명이 적은 10명이었다. 얼마 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농구대회 우승실패의 책임을 물어 주장 김영일을 제외시켰다. 대신 나와 기업은행 소속 김정훈이 포함되었다. 첫 해외여행이기 때문에 긴장도 되었고, 많은 것을 배워오겠다는 각오도 했다.

 

미군 수송기 타고 14시간 만에 시애틀 안착

그 당시 국가대표 감독은 주한 미군 장교였던 ‘제프리 가스폴’이 맡고 있었다. 대한농구협회가 미국의 선진농구를 배워보자는 방침을 세워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영입한 것이다. 장신인 서구선수들과 싸우기 위한 미국 전지훈련을 추진했지만, 항공료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주한 미군 사령관에게 통사정하여 미 군용기를 공짜로 타고 가게 되었는데, 출발 날짜가 북한 문제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기억하는 분도 있겠지만 68년 1월21일 북한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 앞까지 침투하여, 28명이 사살되고 2명 도주, 1명이 생포된(김신조) 1, 21사태가 일어났고, 이틀 후 1월 23일에는 83명의 승무원이 타고 있는 미국 첩보함을 북한이 납치한 ‘프에블로’호 사건이 터졌다. 그러한 사정 때문인지 선수단 출발 예정일인 1월 24일을 넘겨서 28일에야 출발했다. 김포공항에서 8시간을 기다린 끝에 겨우 얻어 탄 비행기는 일본 ‘타지카와’ 군용 비행장에 내려주고 본토로 가버렸다. 우리는 대합실 바닥에 앉아 다음날 새벽까지 기다렸다. 전 미군에 비상이 걸려 미국까지 태워다 줄 수가 없으니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가스폴 감독이 미국, 캐나다에 경기 일정이 잡혀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가야 한다고 밤새 싸웠다. 여객기가 아니어도 좋으니 미국에 가게만 해 달라고 통사정! 영문도 모르고 새벽 6시에 안내자를 따라가보니 대형 화물 수송기가 보였다. 우리 선수단은 영어 잘하는 조동재 단장, 김무현 주장, 곽현채, 유희형 4명이었고, 일본인 해군 장교 한 명이 함께 탔다. 수송기는 바로 이륙했다. 선수단이 13명인데 탱크 10대를 실을 수 있는 대형 비행기에 5명만 싣고 가다니, 이해가 되질 않았다. 수송기이기 때문에 간이 좌석이었고, 방음이 되지 않아 서로 대화도 할 수도 없었다. 14시간의비행 끝에 시애틀 군용 비행장에 내렸다. 대합실에서 무한정 기다려도 후속 팀은 오질 않는다. 

20여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먹은 것은 고작 핫도그 뿐이었다. 공항 밖에 핫도그 판매소가 보였다. 한 개에 1 달러였다. 4개 값 4달러를 주었는데 점원이 돈을 더 내라고 손을 내민다. 세금을 별도로 받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창피했다. 대합실 맨바닥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슬픈 장면을 수없이 보아야만 했다. 수많은 젊은 군인들이 베트남으로 떠나며 가족이이별하는 장면이었다.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지옥 같은 전쟁터로 가야 했다. 사랑하는 부모와 애인, 그리고 아내, 아이와 헤어지는 장면은 너무나 슬프고 애처로웠다. 눈물을 쏟으며 부둥켜안고 우는 가족들, 말을 하지 못하고 슬픔을 삼키는 군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슴이 아팠다. 64년에 시작된 베트남전쟁에서 미군 5만 8천 명이 죽었다. 

미 서부지역 순회경기 갖고 선진농구 배워 

20시간 동안 연락이 되지 않던 후속 팀은 샌프란시스코에 있다는 소식을 초청단체인 피플 투 피플을 통해서 겨우 알아냈다. 그곳에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온 후속 팀과 시애틀 공항에서 상면했다. 이틀만이었다. 50년 이산가족의 재회보다 더 반가웠다. 만남의 기쁨을 제대로 나눌 겨를도 없었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벌어지는 첫 경기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숨 돌릴 틈도 없이 1시간 비행 끝에 밴쿠버공항에 도착하니 경기 시작 한 시간 전이었다. 한복을 입은 교민들이 환영 나와 있었다. 한국에서 스포츠팀이 처음으로 밴쿠버에 왔고 ‘신동파’ 등 유명선수가 많은 농구팀이기 때문에 전 교민이 경기장에 와서 열렬히 응원해 주었다.서울을 떠난 지 70여 시간 동안 잠도 못 잤고, 구두 한번 벗어 보지 못했다. 1회 용 칫솔이 없던 시절, 양치질 한번 못했다. 밴쿠버에서 첫 경기 상대는 사이먼 프레이저(Simon Fraser)대학이었다. 제대로 뛸 수가 없었다. 벤치에 앉아있는 선수들은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고 감독이 선수교체를 위해 나가라고 하면 인상부터 찡그리고 손을 내저으며 사양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85-101로 완패했다. 그 와중에 신동파는 32점을 넣었다. 2차전인 UBC 대학(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과 경기는 내용이 좋았다. 전반에 5점을 리드했고, 경기 종료 4분 전에도 7점을 앞섰다. 결국 뒷심 부족으로 84-92로 패했다. 

사이먼 대학과 두 번째 경기도 83-87로 졌지만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신장 차이가 있었지만, 여독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제대로 경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 후 미국 서부 전역을 돌며 17경기를 했다. 6승 11패로 성적은 저조했지만, 장신선수와 부딪히며 쌓은 실전 경험은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었다. 우선 흑인선수의 공포에서 벗어난 것이 큰 소득이었다. 전미대학체육협회(NCAA) 3부 소속 팀이라고 해도 신장이 우리보다 월등히 크고 개인기가 좋았다. 대학팀과는 모두 11경기를 치뤘다. 우리가 거둔 6승 가운데 2승을 챙겼고, 9번 졌다.두 번 모두 샌디에이고에서 승리했다. 샌디에이고대학과의 첫 경기에서 109-90으로 이겼고, 두 번째 주립대와 대결에서 96-84로 승리했다. 강팀이었지만, 한국에서 온 해군 장병의 응원 힘이 컸다고 본다. 그 경기에서 자유투를 22개 중 21개를 성공시켰다. 전지훈련의 효과가 나타났다고 본다. 

어려웠던 대표팀 사정으로 민박 기숙사에서 숙식 해결

국가대표팀 전지훈련이었지만, 경제 여건이 좋지 않아서 선수단은 주로 민박과 대학교 기숙사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민박의 경우 시합이 끝나면 그 대학의 교수나 교직원들에게 선수 1명씩을 배정해 준다. 배정받은 미국인의차에 짐을 싣고 그분의 집으로 가는데 미국인의 얼굴이왜 그리 똑같아 보이는지…. 첫 해외여행이고 영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어 무척 고생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산책을 하는데 어디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우리나라 노래 멜로디였다. 반가워 뛰어가니 동료 선배였다. 나와 같은 처지를 당하고 산책 나온 것이다. 밤새 못한 한국말을 쏟아냈다. 어려운 여건과 환경 속에서도 시합이 끝나면 후배는 선배들의 땀에 젖은 유니폼을 빼앗다시피 가져다 정성스럽게 세탁해 주었고, 선배들은 후배에게 힘든 일을 시키지않으려고 방문을 잠그고 손수 빨래를 하는 훈훈한 모습도 있었다. 이러한 선·후배 간의 존경과 사랑이 팀워크를 강철처럼 단단하게 했다. 멕시코올림픽 선전에 이어 1969 아시아선수권, 1970 아시안게임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은 원동력이 된 것으로 생각한다.

 

유희형 / 전 KBL 심판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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