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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농구] ① 스승을 만나다

--유희형 농구

by econo0706 2022. 11. 9.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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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12

 

점프볼이 유희형 전 KBL 심판위원장이 쓰는 <나의 삶 나의 농구> 연재를 시작합니다. 1960~1970년대 남자농구 국가대표를 지낸 유희형 전 위원장은 이번 연재를 통해 송도중에서 농구를 시작한 이래 실업선수와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살아온 농구인생을 독자들에게 담담하게 전달할 예정입니다. 첫 번째로 위대한 스승 전규삼 선생과 만남이 농구인생으로 결정된 운명적 이야기를 게재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달랑 주소 하나만 들고 인천으로 출가한 큰누나 집을 다녀온 후, 나는 인천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하겠노라 결심했다. 시골학교지만 육상선수를 하면서도 6년 우등상을 탄 실력만 믿고, 가장 좋다는 인천중학교에 원서를 냈다. 보기 좋게 떨어졌다. 난감했다. 후기 학교를 물색하던 중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개성의 명문이었던 송도중학교에서 인천중 낙방생들을 성적순으로 받아준다는 것이다. 무난히 합격했다. 창피하게 후기 원서를 들고 다시 모교를 찾아가야 하는 고민도 해결된 것이다. 곧바로 수속을 마쳤다.

 

# 사진_본인 제공


▲ 송도중 입학하고 운좋게 만난 전규삼 선생님


송도중학교에 입학 후 누나 집에서 통학했는데, 학비가의외로 많이 들었다. 부모님이 대줄 형편이 못되어 묘안을 찾아야 했다. 방법은 두 가지였다. 공부를 잘 해 장학금을 받든가, 아니면 운동부에 들어가는 길이었다. 전자를 택하기에는 내 학업실력이 부족하다고 판단, 자진해서 농구부에 들어갔다. 육상부는 없었다. 유도부가 있었지만, 달리기 잘하는 나로서는 농구가 적성에 맞을 것 같았다. 만약 축구를 했다면, 아마도 농구 버금가게 잘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준족(駿足)의 육상 소질을 충분히 발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61년 그렇게 시작한 농구를 1978년까지 계속했다. 농구부 입단 후 훈련에만 전념했다. 소풍이나 수학여행은 가본 적이 없다. 어린 나이였지만 오직 농구만을 생각하고 노력했다. 휴일이나 명절까지도 혼자 연습하며 미래의 꿈을 향해 뛰고 또 뛰었다.

기회는 노력하는 자에게 찾아온다고 했던가, 그 무렵 운좋게 훌륭한 스승을 만난 것이다. 전규삼 선생님이다. 개성의 갑부 아들로 태어나 송도고와 일본 호세이대학을 졸업하셨다. 유학을 마친 후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학창시절 체조선수를 했지만, 만능 스포츠맨이셨다. 개성 송도고 교사 재직 시 운동부 육성에 앞장섰고, 무려 6종목(농구, 체조, 탁구, 수영, 복싱, 빙상)의 지도를 맡으셨다. 수업이 끝나면 자발적으로 연습을 했고, 졸업한 선배들이 무보수로 지도했다고 한다.

송도학교는 우리나라 최초 실내체육관이 있었던 명문고며, 역사가 깊은 기독교계 학교다. 체육관이 거의 없던 시절 겨울철에 많은 팀이 전지훈련을 왔다고 한다. 6.25 전에는 개성이 이남이었다. 경기도에 속해있어 서울, 인천에서 열리는 대회에 자주 참석했다고 한다. 전 선생님은 대회에 참가한 수영선수들을 귀가시키던 중 한국전쟁이 터져 개성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결국, 부모 자식(2남 1녀)과 생이별하셨다. 이산가족 만남 신청도 하지 않아 북에 있는 가족을 끝내 만나보지 못하고, 2003년 돌아가셨다. 뒤늦게 재혼을 하셨지만, 자식이 없으셨다. 당신이 가르치는 농구선수가 귀한 자식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그래서 선생님의 지도에는 남다른 사랑이 듬뿍 담겨 있었다.

개성에 있던 송도학교가 인천에 개교하였다. 선생님은 학교설립의 창설 멤버였다. 교사로 재직하시던 중 교감 자리 때문에 사표를 내셨다. 당연히 교감이 되셔야 하는데, 다른 분이 임명되자 화가 나 교직을 내던진 것이다. 가족이 있었다면 사직을 쉽게 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집에 계시던 중 무보수로 농구팀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1학년 때다. 내게는 하늘이 내려 준 다시없는 사제의 연이었다. 선생님의 지도방법은 독특했다. 인자하시며 절대 화를 내지 않으셨다. 사랑으로 가르쳤고, 공부를 무척 강조하셨다. 운동은 길어야 30세 까지고, 그 후 평생을 살아가려면 학교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셨다. 수업출석과 시험성적을 모두 기록하고 독려했다. 선수 생활 때는 술, 담배, 여자를 멀리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술은 가끔 마셨지만, 담배는 피워본 적이 없다.

# 사진_본인 제공

 

▲ 제자 중 멕시코올림픽 대표 나온다고 예언, 2년 후 내가 선발되어 적중


농구 지도방법도 독특했다. 선생님이 연구해서 만든 훈련방법이다. 기본기를 충실하게 가르쳤다. 지역방어를 하지 않고, 드리블 없는 속공을 주문했다. 당시로는 상당히 획기적인 것이다. 패스만 하는 속공을 하려면 시야가 넓어야 하고, 리바운드볼 처리가 빨라야 한다. 여름방학 합숙할 때면 일주일간 한 손을 묶고 생활하게 했다. 양손을 모두 잘 써야 하므로 오른손잡이는 일주일 내내 왼손으로 모든 생활을 하게 했다. 음식 먹을 때도 예외가 없다. 왼손 드리블, 슛 등이 어려웠는데 그 후 많이 좋아졌다. 그때부터 성적을 내기 시작했다. 고2, 3학년 때 전국체전 2연패를 했다. 지방 팀으로는 최초여서 농구계가 깜짝 놀랐다.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관심이 높아졌다. 농구계에 새로운 지도자상이 세워진 것이다. ‘유희형’에 대한 평가도 높아졌고, 뛰어난 유망선수라고 각종 언론에서 극찬하기 시작했다.

고3 때, 선생님께서 2년 후 개최되는 멕시코올림픽에 우리 선수 중 국가대표로 뽑힐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누구를 콕 집어 지목하지 않으셔서 그 말씀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분 예언이 이루어졌다. 내가 뽑힌 것이다. 졸업하자마자 19세에 올림픽 대표선수로 뽑혔다. 그리고 10년간 주전선수로 활약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서는 시기,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가슴에 태극기를 달았다. 국위선양을 위해 열심히 뛰었다. 아시아 1위 할 때 주역을 맡아 많은 팬의 사랑도 받았다. 보람도 있었고 자부심도 많았다. 그때부터 송도고가 농구의 명문, 스타 산실이라는 평을 받기 시작했다. 김동광, 이충희, 강동희, 현역인 김선형(SK) 등 농구 스타들이 줄줄이 배출되었다. 모두 선생님의 제자다. 내가 선수로 성공한 것도 스승 전규삼 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 나의 꿈과 희망을 실현하게 해주신 위대한 스승


모든 농구 지도자들은 이기는데 목표를 두고 가르친다. 그러기 때문에 지역방어와 쉬운 동작만을 주문한다. 전 선생님 지도 철학은 달랐다. 승리보다 기본기를 철저하게 가르쳤다. 이기고 지는 것에 신경 쓰지 않으셨다. 수비의 기본인 대인방어를 고집했고, 어려운 기술 동작을 장려했다. 그래서 제자들은 성장 속도가 빨랐다. 김동광, 이충희도 고교 때는 주목받지 못한 선수였다. 대학에 가서 일취월장 성장한 선수다.

전규삼 - 그분이야말로 열정과 끈기, 폭넓은 이해와 격려, 인격적 감화로 어린 시절 내게 꿈과 희망을 실현하게해 주신 위대한 스승이었다. 삼가 그분의 명복을 빌며 옷깃을 여민다.

유희형은?


유희형은 1949년 3월 10일 충북 청원군에서 출생했다. 송도중 1학년 때 농구를 시작해서 송도고를 거쳐 전매청에서 민완 가드로 활약했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 남자농구 대표팀에 선발되었고, 1969년 방콕 아시아선수권대회와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한국남자농구 우승 주역중 한 명으로 주목받았다. 남자농구 명가드 계보를 열었던 그는 1978년까지 대표선수로 활약했고, 은퇴 후에는 관계로 입문, 문화체육부와 월드컵 조직위원에서 체육행정가로 매끄러운 일솜씨를 발휘했다. KBL 출범 후에는 심판위원장과 경기이사를 역임했다. 1984년부터 1977년까지 KBS해설위원을 맡아 해박하고 명쾌한 입담을 과시하기도 했다. 한양대 겸임교수와 마천청소년수련관장도 지냈다.

 

유희형 / 전 KBL 심판위원장

 

점프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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