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내력 - 김남주

한국의 名詩

by econo0706 2007. 2. 18. 09:26

본문

학생-클립아트

 

내력 - 김남주

 

찢어지게 가난한 마을에도
잘 사는 집은 한두 채 있기 마련이지요
보리고개 너머로 달 넘기고 해 넘기고
일년 삼백예순 날 목구멍에 거미줄까지는 안치고
그작저작 질기게 명 이어가는 사람이 태반이지만
그래도 한두 집은 곳간에 나락 쟁여놓고
장리쌀 빚돈까지 놓아가며 살기 마련이지요

 

첩첩산골 산비탈에 게딱지로 엎어져
거칠게 산사람처럼 어둡게 두더지처럼
옹기종기 이웃하고 사는 우리 마을에서
그래도 부자라면 제일 가는 부자는
이름처럼 천석꾼 만석꾼은 아니지만
이 비탈에 반달만하게 저 골짝에 멍석만하게
천둥지기 별떵지기로 아흔 여섯 배미를 일군
만석이 아버지 천석이지요

 

만석이 아버지 천석이 어른 열두 살에서
스물 입곱까지 15년 노총각으로
산 너머 평지마을 고씨 집에서 꼴머슴 실머슴 한많은 종살이지만
구부러진 환갑 조금 넘어 서른 넷에
새벽에 눈 뜨고 해뜰 때까지 세고 다녀도
똑바로 다 못세는 그 많은 논배미 밭다랑을 장만할 수 있었던 것은
서산에 해 지고 달 지는 줄 모르고
고집그럽게 백사리처럼 일밖에 몰랐기 때문이지요
지게 지고 장에 가서 막걸리 한 잔 안걸치고
돌아올 때 꽁무니에 갈치 한 토막 안달고 왔기 때문이지요
비온느 날 공치는 날 온 마을이 도야지 잡아 추렴해도
비게 한 점 내장 한 근 사먹을 줄 몰랐기 때문이지요
자식들이 나오면 아들딸 구별않고 국졸로 끝내고
아들에게는 소 고삐 잡혀 딸에게는 바구니꾼 잡혀
산으로 들로 내몰았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해서 된 주자 요즘 세상에는
눈 씻고 봐도 없지요 허리가 휘어지고
손가락이 쇠갈퀴되도록 흙을 긁어 모아도
재산같은 것 불어나기는커녕
조금 있는 것마저 도둑쥐처럼 빠져 나가지요
그래 천석이 아들 만석이도
흙 그만 파고 대처로 나갈까 하다가
아버지의 만류도 있고 해서 멈칫멈칫하던 중
새마을 바람인가 헌마을 바람인가 불어서 그도
양잠인가 누에치긴가 하기 시작했지요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나오는 밭에
여기저기 구덕을 파고 뽕나무를 심었지요
나라에서 권장하고 장려하는 일이라며 면서기가
손수 갖다 준 묘목을 심었지요
봄이 가고 가을이 오고 무럭무럭 뽕나무도 자라서
이듬 해 봄에는 뽕잎도 탐스럽게 열렸지요
그래서 가을에는 누에농사 보겠다 싶어
온 식구가 달려들어 잠실조 짓고 섶도 올리고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러둥대는데
뽕나무 심으라 손수 뽕나무까지 갖다 준 면서기가 와서
뽕나무 뽑고 다른농사 지으라 했지요
수출길이 막혀서 그런다 했지요
"뭐이라고라우 어제는 심으락해놓고 오늘 와서는 뽑으라
누집 망쳐먹을라고 일부러 그러능거요?"
만석이의 삿대질에 면서기도 맞삿대질이었지요
"엇따가 삿대질인가 이 사람아
나라에서 시키고 상관이 시켜서 심으라고 했을 뿐인디
나한티 무슨 죄가 있다고 글능가 응?"

 

이문없는 농사에 뽕나무까지 동티나서
평생에 안 지던 빚까지 지고
피눈물나게 일구어 놓은 전답까지 팔아조져야 할 판에
이번에는 5.17인가 뭔가 나더니
새 시대 새 인물인가 뭔가 나더니
비육운가 뭔가를 키워 보라 했지요
우리 면에서 조건이 맞는 집은 만석이 자네 집밖에 없다며
이번에는 조합 서기가 와서 권했지요
영농자금인가 뭔가 주어가면서까지
그래 밑져야 본전치기는 될 성싶어서
논 중에 제법 네무 번듯한 것 몇 마지기 팔아서
비육운가 뭔가를 하기로 했지요
새끼소 일곱 마리를 마리당 95만원에 샀지요
조합에서는 종합사룐가 뭔가를 사다 먹이라고 했지요
턱도 없는 가격에 돈이 아까워서 시늉으로만 먹이고
온 식구가 동원되어서 풀을 베어 먹였지요
논에는 벼 대신 자운영을 길러 겨울에 먹이고
밭에는 옥수수를 심어 가을에 먹이고
3년을 먹여 엉덩이에 윤기가 돌게 살찌게 키워서
산 너머 다리 건너 쇠전에 내놓았지요
마리 당 40만원인가 얼만가 했지요
온 식구가 대들어 3년간 키워놓은 어미 소가
세끼소 반금도 안 되었지요
수입소 때문에 그런다 했지요 사람들은

 

아무리 찢어지게 못사는 마을에도 잘 사는 집은
한 두 채 있기 마련이지요
이제 그런 집 한 채도 없지요 눈 씻고 봐도 없지요
5.16인가 뭔가 나고 새마을 인가 생기고
5.17인가 뭔가 나고 새 시대 새 인물인가 나고
아무리 잘 사는 부자 마을에도
빚 안지고 사는 집은 한 채도 없지요
우리 마을에서도 이제 부자라면 제일 가는 부자는
천석이 만석이네 같은 집이 아니지요
논 사서 소작 놓고 자기는 도회지에서 장사하는 사람이지요
면에 가서 면서기라도 하는 사람이지요
조합에 가서 서기라도 하는 사람이지요
손에 흙 안 묻히고 침발라 돈이나 세거나
책상머리에서 펜대나 까딱까딱하는 사람이지요
천석이 만석이네 논도 그런 사람들이 사갔지요

'한국의 名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세의 희탄 - 이상화  (0) 2007.02.18
해의 품으로 - 박두진  (0) 2007.02.18
남사당 - 노천명  (0) 2007.02.18
머들령 - 정원  (0) 2007.02.18
벌거숭이의 노래 - 김형원  (0) 2007.02.18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