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가마귀떼 - 최승호
빈 들이다. 한 추수가 끝나고
보리알들이 다시 빈 들에 뿌려진다.
황혼이다. 곡괭이를 든 농부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여행이다. 나그네는 빈 들길에서
허물 걸린 자신의 늑골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의 긴 숨결을 느낀다.
빈 들의 바람 속에 나그네가 있고
나그네의 안에 빈 들의 바람이 있다.
갈가마귀떼다. 그들은 굶주린 거지떼로서
붉은 하늘을 덮으며 날아간다.
갈가마귀떼를 황혼의 장관으로
물통을 든 나그네는 오래도록 바라본다.
잡귀들도 늙으면, 자취 없이 흩어져버린다. 뭉쳐졌던 잡기(雜氣)가 다시 흩어져, 무로 돌아간다 하니, 이것이 김시습의 영혼멸실론(靈魂滅失論)이다. 무로 돌아 간다거나, 무무(無無)로 돌아간다 말들 하지만, 무엇이 있어서 무슨 무로 돌아가는가. 무라는 말을, 밑씻개종이처럼 갈갈이 찢어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