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2. 05
(1) 도핑테스트와 소변
우려했던 대로 도쿄 올림픽 개막에 대해 계속 잡음이 나오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1년 연기됐지만 그마저도 확실하지 않다.
기억의 흐름은 자연스레 1988년 서울 올림픽으로 이어진다. 내가 처음 현장에서 취재한 올림픽이다. 서울 올림픽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너무나 많다. 벌써 33년이 지났으니 대한민국 국민 절반 정도가 체험하지 못했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다.
당시 나는 사회부 기자였다. 하지만 한국에서 처음 개최한 올림픽인 만큼 내근 기자 몇 명 빼고는 거의 모든 기자가 올림픽 취재에 동원됐다.
나는 오전에 사회부 기사를 송고한 뒤 오후에는 경기장으로 갔다. 종목이 정해진 게 아니라 그 날 기사가 많이 나올만한 곳으로 투입됐다. 한국의 첫 금메달은 레슬링에서 나왔다. 경기는 체육부 선배의 담당이었고, 나는 주변 취재와 기자회견을 커버했다.
성남의 상무 체육관에서 벌어진 그레코로만형 74kg급 경기에서 김영남 선수가 금메달을 땄다. 나는 메달리스트 기자회견장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30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도 선수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내외신 기자들이 모두 아우성이었다. 지체되는 이유도 알려주지 않았다. 자정을 넘기고 난 시각에 선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울 올림픽은 미국과 유럽의 시청자들을 위해 주요 경기가 모두 저녁에 시작했다.
화가 잔뜩 나있는 기자들을 향해 김영남 선수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오줌이 나오지 않았어요."
기가 막혔다. 메달리스트는 의무적으로 도핑테스트를 해야 한다. 그런데 경기 중에 너무나 많은 땀을 흘린 탓에 물과 주스를 아무리 마셔도 오줌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의 두 시간 만에 성공(?)했다고 했다.
▲ 사진=서울 올림픽 홈페이지,대한레슬링협회 / 이코노텔링그래픽팀.
다음에는 한국의 메달밭인 유도 경기가 벌어지는 장충체육관으로 갔다. 첫날, 남자 60kg급의 김재엽이 예상대로 금메달을 땄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기사 작성을 마치니 새벽 2시였다.
다음날,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65kg급의 이경근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연이은 금메달 소식에 기뻤지만 몸은 피곤했다. 그 다음날도 유도장으로 가라고 했다. 71kg급 박정희. 전망 자체가 메달권 밖이었다. 매일 아침부터 새벽까지 녹초가 된 기자들 사이에서 "이왕 지려면 아예 1회전에서 져라"는 말이 나왔다. 바람대로(?) 박정희는 2회전에서 졌다. 그런데 유도는 패자부활전이 있다. 박정희를 이긴 일본의 고가 선수가 결승에 오르는 바람에 박정희는 패자부활전에 나섰다. 하지만 패자부활전에서도 첫 경기에서 졌다.
한국 기자들이 모두 "만세"를 외치며 "오늘은 빨리 집에 가서 쉬자"고 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들렸다.
"이제 보니 기자님들 모두 비애국자들이예요."
뒤를 돌아보니 자원봉사자들이 우리를 째려보고 있었다. 자기들은 열심히 응원하고 있는데 기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빨리 지라고 했으니 그럴만했다. 창피해서 자원봉사자들의 눈을 피했던 기억이 있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었던 그들도 이제는 50대 초중반의 중년이다.
(2) 수영사상 첫 흑인 금메달리스트
앤서니 네스티(Anthony Nesty)는 올림픽 수영 사상 첫 흑인 금메달리스트다. '사상 첫'이라는 타이틀은 영원하다. 그 사건이 바로 서울 올림픽에서, 잠실 실내수영장에서 탄생했다.
나는 그 역사적인 순간에 그 현장에 있었다. 기자로서 누리는 가장 큰 특혜가 바로 '현장'이다. 대한민국 체육부 기자들에게 서울 올림픽 취재는 큰 영광이자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이전까지 올림픽 취재 경험이 있던 기자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올림픽에 가도 우리나라 선수들만 취재하면 끝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주최국이 되니 모든 경기, 모든 선수들이 취재대상이었다.
중앙일보 체육부도 오랜 기간 올림픽 취재를 준비했다. 개막 한 달 전부터는 아예 신문사 앞에 여관방을 잡아놓고 합숙을 했다. 종목별로 예상 답안지(?)를 마련해서 미리 기사를 써놓기도 했다. 예를 들면 금메달이 예상되는 선수의 프로필 기사 같은 것이다. 당시에 나는 사회부 기자였지만 체육부 선배들이 얼마나 고생하는 지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1988년 9월21일. 남자 접영 100m 결승이 벌어졌다. 한국 선수가 없는 이 경기에 사회부 기자까지 투입된 것은 매트 비욘디(미국) 때문이었다. 비욘디는 7관왕까지 노리는 스타였다.
▲ 사진(앤서니 네스티(왼쪽))=올림픽 유튜브 채널 / 이코노텔링그래픽팀.
경기가 시작됐다. 50m 반환점을 돌았을 때 전광판에는 당연히(?) 5번 레인의 비욘디가 1위로 찍혔다. 그런데 비욘디가 터치패드를 찍고 나서 전광판을 돌아보더니 환호를 하지 않았다. 뭐지? 전광판을 보니 비욘디가 2위였고, 1위는 3번 레인의 앤서니 네스티였다. 네스티가 누구야? 국가명인 'SUR'을 아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당시는 인터넷도 없을 때였다. 이리 뛰고 저리 뛰어서 겨우 SUR이 수리남의 약자라는 건 알아냈으나 처음 듣는 나라.
요즘 말로 '멘붕'이었다. 정말 발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뛰었다. 1987년 팬암 대회에서 네스티가 금메달을 땄을 때 'TIME'에 기사가 났었다는 것을 귀동냥으로 들었다. 복사한 한 장짜리 기사에 열 명 정도의 기자가 들러붙었다. 인구가 39만 명인 남미의 소국 수리남에는 정식 수영장이 하나 밖에 없다는 등 열심히 베껴서 기사를 송고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데 사진부 선배의 말이 더 기가 막혔다. 네스티의 사진을 못 찍었다는 것이다. 사진기자들도 당연히 비욘디가 우승하는 줄 알고 5번 레인에 포커스를 맞춰놓고 기다렸으니 꽝이었다. 네스티가 환호라도 하고, 좋아했으면 얼른 찍었을 텐데 그나마 조용히 그냥 밖으로 나가버리는 바람에 사진기자들은 한동안 누가 우승했는지 몰랐다고 했다. 그래서 네스티의 우승 장면 사진이 없다.
나중에 기자회견장에서 그 이유를 알았다. 네스티는 매우 조용한 선수였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는데 크게 웃지도 않고, 말도 차분했다. 잘해야 동메달을 기대했는데 1위로 들어와 자기도 어리둥절하다고 했다.
네스티는 수리남의 영웅이 됐다. 기념우표와 기념주화도 나왔고, 네스티 체육관이 생겼다는 뉴스를 봤다. 나에게 네스티는 단순한 올림픽의 영웅이 아니다. 특별한 경험을 안겨준 '특별한' 선수다.
(3) 안재형-자오즈민의 키스
서울올림픽은 1988년 10월2일에 폐막했다. 다음날인 3일 저녁 선수촌 광장에서는 선수들을 위로하는 공연이 열렸다. 현재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선수촌 아파트가 당시 선수촌으로 지어진 것이다.
모든 경기를 마친 선수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공연을 즐겼다. 한 시간 정도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중국 여자탁구선수 자오즈민이 옆을 지나갔다. '자오즈민이 가네'하며 걸음을 재촉하는데 곧이어 한국 남자탁구선수 안재형이 지나갔다. 순간, 기자의 촉이 발동했다.
안재형과 자오즈민이 사귄다는 소식은 올림픽 개막 전에 타 신문에서 보도했으나 두 선수 모두 강력하게 부인하는 바람에 흐지부지 됐었다. 안재형의 뒤를 따라갔다.
한참을 걸어 선수촌 뒤편 탄천 쪽으로 돌아가자 둘이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카메라가 없었다. 지금처럼 카메라가 달린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라 사진을 찍으려면 카메라가 있어야 했다. 이미 한 번 부인했던 터라 기사로 아무리 자세히 써봐야 또 부인하면 그만이었다.
사진 한 장이면 완벽한 특종인데 카메라를 구할 방법이 없었다. 하도 답답해서 인근 경비초소를 지키던 경찰에게 "혹시 카메라 없나"며 애원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아 키스를 나눴다. 어느 순간 인기척을 느낀 둘이 서둘러 헤어졌고, 취재는 거기까지였다.
허탈한 심정으로 신문사로 돌아와 자세하게 기사를 썼지만 역시 둘은 사실을 부인했고, 임팩트는 약할 수밖에 없었다.
▲ 자오즈민과 안재형의 아들(골프선수 안병훈)이 어렸을 때의 사진. 사진(자오즈민(왼쪽),자오즈민과 안재형의 아들 안병훈(가운데),안재형(오른쪽))=CJ / 이코노텔링그래픽팀.
두 사람은 다음 해인 1989년 12월에 결혼했다. '한-중 탁구 커플'의 아들인 안병훈은 유명 프로골퍼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선수들 사이에서는 이미 두 사람이 사귄다는 사실이 퍼져있었다. 묘하게도 여자 복식 결승 상대가 한국의 양영자-현정화 조와 중국의 자오즈민-첸징 조였다. 양-현 조는 세트스코어 2-1로 이겨 처음으로 세계최강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거는 쾌거를 이뤘다. 경기 후에 양영자가 현정화에게 "연애 중이던 자오즈민이 안재형을 훔쳐보느라 스텝이 꼬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서울대 체육관에서 벌어진 이 결승 경기는 다른 에피소드도 남겼다. 한국의 취재진도 간절하게 금메달을 원했다. 누군가 "'이 기자'만 남고 다 나가자"고 소리쳤다. 결국 '이 기자' 다섯 명만 풀 기자로 취재하고, 다른 기자들은 취재를 포기하고 경기장 밖으로 나갔다. 이들의 간절함이 통했던 것 같다.
올림픽에서 세계 각국 기자들이 모이는 곳이 MPC(Main Press Center)다. 기자들은 이곳에서 기사를 작성하고, 서로 취재하고, 소식을 나누기도 한다. 거기에서 머리가 백발인 기자를 만났다. 어느 나라 기자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올림픽만 여덟 번째 취재"라는 말을 들었다. 올림픽이 4년마다 열리니까 최소 30년 이상 취재를 했다는 계산이다. 당시 한국에는 전문기자나 대기자 제도가 없을 때여서 '올림픽만 여덟 번'이라는 말이 한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나도 어찌하다 보니 서울 올림픽을 시작으로 1996년 애틀랜타, 2000년 시드니, 2008년 베이징 등 네 차례나 올림픽을 취재한 기자가 됐다.
손장환 편집위원 inheri2012@gmail.com
자료출처 : 이코노텔링(econotelling)(http://www.econotelling.com)
[스포츠史說] 벤투와 정몽규의 리더십 (0) | 2022.09.18 |
---|---|
[스포츠史說] 삼성생명 김보미의 '감동 투혼' (0) | 2022.09.17 |
[스포츠史說] GS칼텍스의 비밀병기 '플로터 서브' (0) | 2022.09.17 |
[스포츠史說] '축구대표팀 음주' 무마사건 (0) | 2022.09.17 |
[스포츠史說] 김보름의 레이스를 탓할 수 있나 (0) | 2022.0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