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24.
역대 으뜸의 병법가로 손꼽히는 손자는 지리적 조건을 무척 중시했다. 지리적 우열이 승패를 좌우하는 하나의 요인이라고 역설했다. 열세 편으로 이뤄진, 손자의 역작인 ‘손자병법’에 지형(地形)이 하나의 편으로 존재하는 데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손자의 지형 중시 사상은 ‘손자병법’ 곳곳에서 배어난다. “높은 언덕에 포진한 적을 공격하지 마라.”(군쟁 편), “물가에 붙어서 적을 맞아 싸우지 마라.”(행군 편) 등은 지형을 중요하게 본 손자의 생각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이 맥락에서, 물을 등지고 포진[背水陣·배수진]하는 전략은 피해야 할 방책이다. 2,500여 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스포츠를 비롯해 사회 제 분야에서 곧잘 유용하게 쓰이는 배수진임을 보면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대목이다.
그러나 최고 전략가인 손자가 이 점을 놓쳤을 리 없다. 인간의 심리까지 간파한 손자는 배수진이 효과적으로 운용될 수 있음도 설파했다. 곧 역설적으로, “병사들은 멸망할 처지에 놓이면 사력을 다해 싸워 활로를 만든다.”라며 사지에 몰아넣어야 전력의 최대치를 끌어낼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처럼 배수진은 극한 상황에서 놀라운 잠재력을 발휘하는 인간 심리를 기반으로 한 방략이다. 중국의 진이 멸망하고 한·초가 천하의 주인을 다툴 때, 한의 한신이 조의 20만 대군을 격파한 전투는 지금까지도 회자하는 배수진의 멋들어진 보기다. 이에 앞서 초의 항우가 솥을 깨뜨리고 배를 가라앉히는 기발한 책략으로 거록대첩의 승자로 개선가를 구가할 수 있었던 파부침주(破釜沈舟) 모략도 또 하나의 좋은 예다.
▲ FC 서울 안익수 감독 / OSEN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안익수와 최용수, 배수진의 심정으로 운명의 한판을 별러
그럼 맞붙는 두 군대가 모두 배수진을 치고 전투를 벌인다면 그 승패는 어떻게 될까? 지형적으로 두 팀이 모두 서로 물을 등지고 싸우는 모습을 실제로 접하기란 어렵다. 그렇지만 심리적으론 얼마든지 가능하다.
스포츠에서, 두 팀 모두 배수진을 치고 맞서는 모습은 종종 연출된다. 물러서거나 피할 수 없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 펼치는 격돌은 그만큼 긴박감을 불러일으키는 한판으로, 스포츠 세계에서 느낄 수 있는 짜릿함을 더욱 배가한다.
스플릿 시스템을 채택해 승강제를 운용하는 한국 프로축구가 대장정을 마칠 때까지 흥미를 잃지 않는 까닭이기도 하다. 특히, K리그 1 B그룹(7~12위) 막판 다툼이 그러하다. 강등권 언저리 팀끼리 K리그 2로 밀려나지 않으려고 벌이는 막판 싸움은 A그룹에서 펼쳐지는 우승 다툼 못지않게 굉장히 치열하다. 당연히 관전자에겐 흥미진진한 승부일 수밖에 없다.
2021 K리그 1 B그룹에서도, 또 하나의 배수진 대회전이 벌어진다. 오는 28일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리는 FC 서울-강원 FC전이다. 패배하면 2부리그 추락이라는 멍에를 쓸 수도 있는 운명의 길목에서 만난 맞겨룸이다.
▲ 강원FC 최용수 감독 / 조선일보
팀당 2경기씩을 남겨 놓은 24일 현재, 서울은 9위(승점 43·11승 10무 15패)에, 강원은 11위(승점 39·9승 12무 15패)에 각각 자리하고 있다. 서울은 일단 곧바로 K리그 2로 추락하는 위험에선 벗어났다. 그렇지만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더 승점을 추가하지 못해 11위로 떨어질 경우엔, 승강 플레이오프를 치러 이겨야만 K리그 1 잔류가 확정된다. 강원은 더 위기다. 자력으로 플레이오프를 치르지 않고 K리그 1에 남으려면, 두 경기에서 다 이겨야만 하는 힘겨운 처지에 맞닥뜨려 있다. 두 경기에서 전혀 승점을 추가하지 못하면 곧바로 K리그 2로 떨어질지도 모를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다.
배수진 격돌은 또 하나의 극적 요소가 더해지며 더욱 절정에 이른다. 안익수 서울 감독과 최용수 강원 감독은 한국 프로축구계의 내로라하는 맹장들이다. 맹장에 걸맞은 승부사로도 뛰어난 풍모와 기질을 엿보인 두 용장이 펼칠 ‘잠실 대회전’은 그래서 벌써부터 눈길을 사로잡는다.
두 감독 모두 시즌 중에 팀을 위기에서 구할 해결사로서 긴급 투입돼 더욱 지략 싸움이 볼만하게 됐다. 선문대학교를 이끌고 대학축구 마당을 평정한 안 감독은 지난 9월 서울 사령탑에 앉았다. 팀의 실추된 명예를 되찾고 명가(名家) 재건의 중책을 맡은 안 감독은 비교적 순조롭게 발걸음을 내딛는 흐름(5승 3무 1패)을 보이고 있다. 2020시즌 도중 사령탑에서 내려온 최 감독은 이달 16일 강원 사령탑에 낙점됐다. 서울전이 강원 지휘봉을 잡은 뒤 처음 나서는 전장이다.
두 감독은 서울을 끈으로 묘하게 얼키설키한 연(緣)을 맺고 있다. 2010년 서울에서, 두 장수는 넬루 빙가다 감독을 보좌하며 동고동락했다. 안 감독은 수석 코치로서, 최 감독은 코치로서 한솥밥을 먹었다. 둘은 안 감독이 부산 아이파크 지휘봉을 잡으면서 동료로서 인연은 끊겼다.
▲ 2011년 FC서울 최용수 감독과 부산아이파크 안익수 감독이 축구회관에서 열린 2011 K리그 6강 PO 기자회견에서 악수를 하고 있다. / 마이데일리 유진형 기자
두 감독은 2011~2013시즌 서로 적장(敵將)으로서 승패를 다퉜다. 안 감독은 부산(2011~2012)과 성남 일화(2013)를, 최 감독은 서울(2011~2016)을 각각 이끌고 K리그를 누비며 힘과 지혜를 다퉜다. 안 감독이 U-20 국가대표팀(2014~2016)과 선문대학교(2018~2021)를, 최 감독이 중국 장쑤(江蘇) 쑤닝(蘇寧·2016~2017)과 서울(2018~2020)을 각각 지휘하면서, 두 장수가 맞겨룰 공통 전장은 더는 없었다.
서울과 인연은 또다시 찾아왔다. 2010년대 후반부터 위기에 봉착한 서울이 맞아들인 사령탑으로서다. 곧, 공통 키워드는 ‘위기 타파’였다. 최 감독은 한 차례 팀을 위기에서 구한 뒤 서울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 만난 위기 상황에서, 이번엔 안 감독이 서울 사령탑에 앉았다.
K리그 1에서, 두 장수는 오래간만에 다시 만났다. 2013시즌에, 서울(최용수)과 성남(안익수) 사령탑으로서 격돌한 지 8년 만이다.
지휘하는 팀은 달라졌다. 공교롭게도 이번엔 안 감독이 서울을 이끌고 나섰다. ‘서울 레전드’로 손꼽히던 최 감독은 강원을 지휘해 서울에 맞선다. 전술했듯, 두 팀 모두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해 있어 피할 수 없는 운명의 한 판이다.
그러나 공통 키워드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위기 타파다. 누가 더 절박한 심정으로 더욱 비장의 배수진을 펼쳐 승전가를 부르며 승부사의 이미지를 굳힐까?
최규섭 / 전 베스트 일레븐 편집장
자료출처 : O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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