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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환상곡] 국가대표보다 위대했던 K리거 스테보

--한준 축구

by econo0706 2022. 10. 11.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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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4. 

 

“안녕하세요.”

 

등장도 어색했고 말투도 어색했다. 188cm의 거구를 이끌고 구부정하게 기자회견장으로 들어선 마케도니아 공격수 스테보의 얼굴은 꽤 상기되어 있었다. 통역이 필요한 외국인 선수가 경기 후 공식 기자회견에 들어오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이론의 여지 없이 압도적인 활약을 펼쳐야만 가능하다.

 

수원삼성블루윙즈와 대전시티즌의 K리그 클래식 16라운드 경기가 열린 3일 밤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선 스테보가 주인공이었다. 그는 1골 1도움으로 경기MVP를 수상했다. 하지만 그 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건이 있었기에, 굳이 스테보가 기자회견장에 등장했다.

 

규정을 어긴 스테보가 박수를 받은 이유

 

스테보는 대전과의 경기에서 득점한 뒤 유니폼 상의를 벗어 젖히며 경고를 받았고, 교체 아웃된 이후에는 관중석으로 뛰어들었다. 관중들은 그라운드가 아니라 관중석을 주목할 수 밖에 없었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크게 질타를 받았을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날 스테보의 행동은 모두 축구가 가진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날은 스테보가 수원 유니폼을 입고 마지막으로 K리그 경기를 뛰었던 날이다.

 

수원은 대전을 상대로 3-1 완승을 거뒀다. 스테보의 관중석 진입으로 어수선한 상황에 한 골을 실점했다. 스테보는 수원 팬들과 얼싸안고 밀착한 채 인사를 나눴다.

 

"내가 팬들에게 해줄 수 있는 아주 작은 일이었다."

 

스테보는 아예 팬들과 함께 관중석에서 응원전을 벌일 기세였지만 경호 요원의 에스코트를 받고 다시 벤치로 돌아왔다.

 

팬들은 경기 양상과 관계없이 스테보를 위한 응원가를 불렀다. 잠시 경기 자체가 소외됐지만,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상의를 벗은 스테보에게 규정에 따라 경고를 준 주심도 환하게 웃었다. 스테보는 경고를 받으면서도 고개 숙여 인사했다. 스테보는 프로축구가 우리네 삶에 왜 필요한가를 일깨웠다.

 

우리는 왜 승리를 갈구하고, 규정을 준수할까?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닌 본질이다. 우리는 우승으로 가는 스토리에 열광하고, 자유를 넘어 방종으로 이어지는 무절제한 행동을 제한하기 위해 엄격한 규정을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실패에 관대할 수도, 규정을 어긴 일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도 있다. 그것이 우리의 진짜 삶이다.

 

수원과 스테보의 아름다운 이별

 

수원은 대전을 꺾고 리그 4위로 올라섰다. 하지만 대전과의 경기에서 더 중요했던 것은 스테보와의 이별이었다. 스테보는 6년의 시간을 한국에서 보냈고, 그 중 가장 열렬한 성원을 보내준 수원에게 마음을 빼앗겼다고 털어놨다. 7월 5일로 계약이 만료되는 스테보는 클럽과 개인의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사랑하면서도’ 헤어져야 했다. 만나고 헤어지는 일은 그렇다. 삶에는 불가항력적인 일들이 있다.

 

수원 관계자는 “우리는 1년 자동 연장 옵션을 가지고 있다. 보내면서 이적료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냥 보내주기로 했다”고 말했다. 스테보 역시 “에이전트에게 내가 수원 유니폼을 입고 마지막 경기를 다 마무리할 때까지 이적에 대한 어떤 일도 진행하지 말라. 수원에 예의를 지키고 싶다”고 말했다.

 

스테보는 기자회견장의 첫 마디로 “수원에서 뛸 수 있어서 행복했다. 모든 것들이 꿈꿨던 대로 이루어 졌다”고 말했다. 꿈은 유럽의 명문클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빛나는 우승 트로피를 가져야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꿈은 우리 삶의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꿈은 본질은 내 몸 전체를 가득 채우는 행복이다. 스테보가 수원에 남다른 애정을 갖게 된 이유는 충만한 행복을 느끼며 지냈기 때문이다.

 

“수원 서포터들은 어메이징(Amazing)했다. 홈이든 원정이든 비가 오든, 덥든 언제나 놀라운 응원을 해줬다. 심장을 드릴 수 있다면 주고 싶었다. 선수들 코치진, 모두들이 내가 이곳에서 행복하도록 도와줘서 감사하다. 내 가족들도 이곳에서 아주 행복했다. 에디 보스나라는 평생을 갈 최고의 친구도 만나게 됐다.”

 

스테보를 원하는 팀은 대부분 아시아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스테보가 K리그와 AFC챔피언스리그에서 두각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K리그에서만 6시즌을 보낸 스테보는 K리그 안에서 수원을 적으로 상대하는 일은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성실함과 충성심의 대명사인 스테보의 의식적인 선택이 아니라, 마음이 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수원 이후에는 다른 한국팀에선 뛰고 싶지 않다. 이제 내 마음이 수원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1~2년의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할 수 없는 일이다.”

 

우승 보다 스토리가 중요하다

 

수원 관계자는 “우승도 중요하지만 그것 보다 중요한 것이 스토리다. 감동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마지막 기자회견이 끝난 뒤 기자들도 스테보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감사하다”고 말하며 떠나는 스테보를 바라보는 수원 직원들의 눈가에도 눈물이 맺혔다. 성과지상주의에 내몰려 하루하루를 앞만 보고 달리는 우리 사회에 경쟁의 극단에 있는 프로스포츠가 경종을 울렸다. 날 선 독설과 비아냥으로 점철된 국가 대표팀의 내분 논란 속에 외국인 선수 스테보가 보여준 진정성은 우리 삶에 왜 축구가 필요한 지를 알려줬다.

 

“뭐라고 말을 더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떠나는 스테보의 마지막 K리그 기자회견은 가진 의미에 비해 짧았다. 하지만 스테보는 이미 온 몸으로 자신의 마음을 충분히 보여줬다. 온 몸을 던지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냈다. 스테보가 치른 모든 경기를 보지는 못했지만, 단연코 이 경기가 그의 K리그 최고의 경기 중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다.경기가 끝나고 스테보는 자신의 유니폼과 축구화, 정강이 보호대와 양말까지 모두 팬들에게 던져줬다. 그리고 팬들이 자신을 위해 만들어준 깃발을 선물로 받았다.

 

스테보는 6시즌 동안 K리그 142경기에서 57골 21도움을 기록했다. 그리고 기록만큼이나 값진 스토리를 남기고 떠났다. 외국인 선수를 향해 ‘용병’이라는 표현을 쓰지 말자는 주장에 최고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기억을 남겼다. 아직 K리그가 나아갈 길이 멀고 험하지만, 스테보는 그 모든 것을 잊게 했다. 한국 축구는 국가의 위상을 드높이는 대표팀 선수들이 아니라 진정한 프로페셔널리즘을 보여준 푸른 눈의 K리거게서 희망을 봤다.

 

한준 기자

 

자료출처 : 풋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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