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30.
만남은 쉽지 않은데, 이별은 늘 갑작스럽다. 녹아 드는 데는 적지 않은 적응기 필요하지만, 끝맺음은 단칼 같다. 세상사가 모두 그렇다. 순식간에 이뤄지는 것은 오직 헤어짐뿐이다. 지난 주말 K리그 클래식 2015시즌은 축구 팬들과 잠시 이별하게 됐다.
수원삼성의 2015시즌은 힘든 자리잡기와 깔끔한 마무리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두 시즌 연속 전북현대에 우승컵을 내주고 준우승팀이 된 수원은 29일 오후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치른 시즌 최종전에서 마침내 전북에 2-1로 승리했다. 올 시즌 전북전 첫 승을 거둔 것이니 유종의 미를 거뒀다고 할 수 있다.
겨울비가 내린 ‘빅버드’는 축축했다. 보수 작업을 마친 잔디는 한참 팀이 필요로 하던 시절의 망가진 모습에서 개선되었다. 이제 제법 공이 잘 굴렀지만 비가 내리다 보니 튀어 오르는 공의 가속에 컨트롤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그래도 리그 우승을 다툰 두 팀은 각자의 사정에 따른 공격적 경기 운영으로 춥고 비오는 날씨 속에도 경기장은 찾은 1만 3천여 관중을 만족시켰다.
전반전은 0-0이었다. 수비적이고 소극적인 경기 운영으로 K리그는 ‘전반전은 버리고 후반전부터 축구한다’는 비아냥을 들었는데, 이날 경기는 그런 방향은 아니었다. 승리해야 자력으로 리그 2위,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ACL) 본선 직행 티켓을 쥐는 수원은 시작부터 공격 일변도로 나섰다.
이미 우승을 확정한 전북도 느슨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주장 이동국이 발목 부상으로 빠졌고, 공격의 핵 레오나르도는 벤치에 대기했지만, 젊은 에이스 이재성을 중심으로 공수 전환이 빠른 축구로 경기 흐름을 주도했다. 이근호와 이승렬은 공격진에 묵직함과 활기를 가져다 주었고, 측면 공격수 문상윤은 경기장 전역을 누비며 공수 양면에 걸쳐 윤활류 역할을 했다.
결과에 대한 부담을 털어낸 탓인지 올 시즌 ‘1강’으로 불리며 독주를 시기에 전문가들로부터 ‘그렇게 강하지는 않다’는 평가를 받았던 전북은 이날 경기에서 비로소 챔피언다운 축구를 보여줬다. 균형과 창조성, 개인 기술과 팀워크가 모두 빛났다. 유일하게 아쉬운 것은 이동국과 레오나르도의 부재 속에 마침표를 찍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올 시즌 전북 원정에서 두 번 지고, 홈에서도 2-2로 비겼던 수원에게 이번 전북전은 당장의 ACL 직행 티켓과 더불어 2016시즌에 대한 기대치를 높이기 위해 매우 중요했다. 수비수 곽희주는 ‘풋볼리스트’와 인터뷰에서 “자칫 전북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 징크스가 될지 모른다는 것이 더 걱정”이라고 했다. 스플릿 라운드 들어 초반 3경기에서 이기지 못하며 스스로 우승 가능성을 잃었던 수원은 포항, 전북과 중요한 연속 경기에서 이기지 못할 경우 패배감 속에 프리시즌을 보내게 될 것이란 염려도 있었다.
▶ 악천후 속에 빅버드를 찾은 13,738명
전북은 젊은, 가능성 있는 선수들을 중심으로 선발 명단을 구성했지만, 수원은 경험 있는 선수들을 중요했다. 골문은 정성룡이, 수비 라인은 곽희주가 지켰다. 2선 공격의 견인차는 염기훈이었다. 모두 30대 초중반의 베테랑이다. 이들 가운데 다음 시즌에도 수원에 남을 것이 확실한 선수는 염기훈뿐이다. 곽희주는 올 해를 끝으로 계약이 종료되고, 정성룡은 J리그 진출이 가시화된 상황이다.
이미 리그 우승의 꿈이 물거품이 되었음에도 악천후 속에 많은 팬들이 찾아온 것은 어쩌면 고별전이 될 수 있는 둘의 경기를 보기 위해서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평소 보다 수원 팬들의 응원 함성은 비 내린 그라운드처럼 조금은 축축했다. 선수들의 얼굴에는 비와 땀이 뒤섞여 내렸는데,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고 난 센터서클에 둥글게 모여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던 순간에는 아마 눈물도 조금은 섞여 있었을 것이다.
축축하게 시작한 경기는 저릿하게 끝났다. 후반 12분 전북이 루이스와 레오나르도를 동시에 교체 투입하면서 공격진에 기름칠을 시작했다. 프로 감독 3년 차를 맞은 서정원 감독은 후반 19분 중앙 미드필더 박현범을 산토스 대신 투입했다. 신중한 선택이었다. 골이 필요한 순간, 상대의 공격 의지에 맞불을 놓기 보다 균형과 안정을 택했다.
공격 숫자를 늘리는 것만이 골로 가는 길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최강희 전북 감독은 결과 자체에 큰 의미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 과감한 선택을 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백지훈의 파트너로 박현범을 세워 루이스와 레오나르도의 커트인 공간을 안정적으로 커버한 수원은 4-1-4-1에서 4-2-3-1로 전환한 뒤 염기훈과 권창훈을 통해 역습을 전개했다.
교체 카드의 효과는 수원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후반 20분 권창훈이 역습 과정에서 과감하게 시도한 드리블 돌파를 전북 수비수 김기희가 무리한 파울로 저지하며 프리킥 기회를 내줬다. 페널티 에어리어 근방. 직접 프리킥 슈팅이 가능한 좋은 위치였다. 수원에는 세트피스 기회가 생기면 반쯤은 골을 넣은 것이나 다름 없는 이 시대 대한민국 최고의 왼발 염기훈이 있었다.
▶ 균형을 택한 서정원, 2015시즌을 지배한 염기훈
스타는 팀이 꼭 필요로 하는 순간 해결한다. 염기훈이 바로 그런 진짜 스타다. 수원 입단 후 99개의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고 있던 염기훈은 통계 기록상으로도 의미 있는 100호 공격 포인트를 바로 이 시점에 강력하고 정확한 프리킥 슈팅으로 성공시켰다. 현장에서 이 골을 목격한 순간 정말로 무릎과 허리 부근이 저릿했다. 비가 와서 관절이 시린 것과는 분명히 다른 ‘짜릿함’이었다.
전북은 쉽게 수원에 승리를 허용하지 않았다. 챔피언 전북이 강한 이유는 선제골을 내주고도 평정심을 유지하고 이를 뒤집을 수 있는 저력이 있다는 점이다. 수원 원정 이전까지 전북은 선제골을 내준 경기의 승률이 50%에 달했다. 먼저 골을 내줘도 절반 정도의 경기는 뒤집었던 것이다. 실제로 수원은 선두 경쟁의 분수령이었던 7월 26일 전주 원정에서 산토스의 선제골에서 경기 종료 8분을 남기고 두 골을 내주며 역전패를 당한 적이 있다.
전북은 실점 이후 수비형 미드필더 정훈을 빼고 서상민을 투입하며 중원 지역의 모든 선수를 공격적으로 배치했다. 그리고 집요한 공격을 통해 후반 39분 동점골을 만들었다. 해결사는 경기 내내 절묘한 인터셉트와 드리블, 패스, 탈압박으로 공격을 이끈 이재성이었다. 이재성은 2015 K리그 클래식 영플레이어상 후보에 올라 있는데, 이날 경기에서 드러낸 존재감처럼 사실은 MVP 후보에 더 어울리는 한 해를 보냈다.
권창훈도 염기훈의 프리킥 골로 이어진 중요한 파울을 얻어냈지만, 경기 전체적으로 이재성이 보여준 농익은 플레이는 영플레이어상 수상 경쟁에서 그가 더 앞서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 경기의 진짜 주인공은 2014시즌 전북에서 K리그 클래식 트로피를 들고 올해 수원으로 이적해온 카이오였다.
카이오는 후반 41분 염기훈의 긴 패스를 받아 간결하고 정확한 오른발 슈팅으로 골문 구석을 찌르며 2-1 승리의 결승골을 넣었다. 친정 전북을 상대로는 꼭 골을 넣고 싶다던 카이오는 올 시즌 공격수로서 겨우 네 골을 넣는데 그쳤지만, 이 골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다.
최강희 전북 감독은 우승 팀에서 MVP가 나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 나이로 서른 일곱이 된 이동국은 여전히 전혀 무리 없이 클래식 최고의 팀에서 최전방 공격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존경을 받을만 하다. 그러나 영플레이어상이 이재성 쪽으로 기운다면 MVP는 수원의 염기훈에게 기운다.
▶ 염기훈이 수원과 K리그에 남긴 메시지
최종전에서 수원이 넣은 두 골을 실질적으로 모두 만들어낸 염기훈은 시즌 내내 이런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8득점 17도움으로 2015시즌 도움왕이자 최다 공격 포인트를 기록한 염기훈은 ACL 무대에서도 도움왕에 올랐고, K리그 통산 최다 도움 기록도 새로 썼다. 팀인 전북이 더 강했을지 몰라도, K리그에서 올해 가장 뛰어난 ‘개인’은 염기훈이었다. 염기훈의 왼발은 경기당 최소한 한 골을 약속하는 보증수표가 됐다.
만 32세의 염기훈은 선수가 전성기를 맞이하는 데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준비’라는 것을 보여준 매우 상징적인 존재다. 올 시즌 염기훈이 이룬 성취 자체가 내부적으로 경기장 밖의 일들로 힘든 시간을 보낸 수원을 단단한 팀으로 뭉치게 한 힘이었다. 더불어 이 땅에 축구를 하는 많은 선수들에게 ‘다시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한 때 비판의 중심이었고, 군 제대 후에는 전성기가 끝났다는 혹평도 있었다. 염기훈은 그 상황에서 다시 일어났고, 팀도 일으켰다.
초반 반짝 돌풍이 아니라, 시즌 마지막 경기까지 동력을 잃지 않고 꾸준함을 보여준 염기훈의 2015시즌도 그런 면에서 축축하고 저릿했다. 그가 수십억에 달하는 중동과 중국, 일본 등지의 거액의 제안을 마다하고 수원에 남은 것도 그랬다. 그가 전북에서 데뷔한 선수라는 점도 이 경기에는 퍽 재미있는 스토리가 됐다. 멋진 경기를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은 마지막까지 '닥공'에 집중한 최강희 감독의 도전적인 자세다. 최강희 감독은 리그를 선도하는 팀이 어떤 축구를 해야 하는 가에 대한 방향성을 새 시즌의 과제로 삼았다. 수원전은 비록 졌지만 K리그의 챔피언이 가야 하는 길을 보여줬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은 스플릿 라운드 일정을 구성하며 이 경기가 사실상 결승전이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전북이 일찌감치 우승을 확정하며 맥 빠진 대진이 되는 줄 알았지만, 이 경기는 수원이 올해 치른 최고의 경기라 할 만큼 재미있었다. 그러나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2015시즌 K리그클래식은 종료 휘슬을 울렸고, 이제 모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서정원 수원 감독은 “지난 해 준우승보다 더 값지다”고 했다. “내년은 살림살이가 더 어려울 것 같다”고도 했지만, 29일의 축축하고 저릿한 승리 속에는 분명 희망도 보였다. 만남에 적응하는 것은 시끌벅적하고 어수선하다. 이별에 적응하는 것은 그보다 조용하고 차분하다. 열전은 끝났다. 100여 일의 ‘오프 시즌’에 돌입한다. 축구공은 또 다시 구를 것이다. 2016시즌에는 하는 이들도 보는 이들도, 이 업계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더 즐길 수 있는 모습으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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