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상황 아래서건 우리들이 살아가는 데에는 여러가지 지식이 필요하다.
조상대대로 무려 냐려온 전답을 팔아서까지 고등교육을 받는 것도, 비싼 달러로 유학을 하는 것도 그러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이다. 지식인(知識人)이어야 인간의 대접을 받고 무식인(無識人)은 이하의 냉대를 받아야 한느 것이 또한 이 세상의 드러난 풍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짜 박사학위까지도 받아가면서 지식인 행세를 하려고 든다.
그럼 인간을 형성하고 있는 본질적인 요소는 지식일까? 물론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대개의 지식인들을 보면 입으로는 저 혼자 잘난 체 떠벌여대지만 막상 어떤 현실 앞에서는 찍 소리 못하고 자라 목처럼 움츠려들지 않는가.
지식이 살아 움직이는 현실 앞에 작용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것일까. 그런데도 어떤 부류들은 정치권력 쪽에 향한 끝없는 아부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불러주지 않는다고 노상 불평인 것이다.
지식은 따지고 보면 하나의 분별(分別)에 지나지 않는 것. 그러니까 많이 안다는 것은 그만큼 분별 망상(妄想)이 많다는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과다한 지식이나 정보가 때로는 인간을 매몰시킨다. 지시이 무표정한 기호(記號)처럼 거래될 경우 거기에는 인간의 뜰이 없다. 현대인들은 접촉의 과소(過少)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과다(過多)에서 소외감을 갖게 된다.
그러고 보면 인간을 형성하고 있는 본질적인 요소는 지식이 아니라 지혜일 것이다. 지식이 차다찬 회색의 이론이라면 지혜는 고동(鼓動)하는 더운 심장이요, 움직이는 손발이다. 지식은 사랑과 무연(無緣)하지만 지혜의 안쪽을 뒤져보면 사랑으로 넘쳐있다. 그러기 때문에 슬기로운 사람은 현실 속에서 살아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지식이 그 본래의 구실을 다하려면 지혜에로까지 심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지헤에서 비로소 신념이 생기고 용기와 행동이 따르게 마련인 것이다. 창백한 지식인, 언행(言行)이 같지 않은 지식인이 소외감을 가지는 것은 지식이 지혜에로 심화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지식은 악지식(惡知識)이지 결코 선지식(善知識)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진정으로 아쉬운 것은 저명한 지식인의 '이론'이 아니라, 신념과 용기를 가지고 행동하는 지혜로운 선지식이다.
1971년 12월 23일
法頂
[靈魂의 母音] 응원단(應援團) (0) | 2007.02.11 |
---|---|
[靈魂의 母音] 국력(國力)의 비애(悲哀) (0) | 2007.02.11 |
[靈魂의 母音] 방황(彷徨)하는 나무들 (0) | 2007.02.11 |
[靈魂의 母音] 마음의 등불을 (0) | 2007.02.11 |
[靈魂의 母音] 살아 남은 자(者) (0) | 2007.0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