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급휴서(割給休書)…나비를 받아 챙긴 규진 모(母)는 그길로 이웃집 아낙에게로 달려간다.
“규…규진이 어무이, 저…저고리가….”
“내사 마…사정파의(事情罷議) 했다 안카나.”
“규진이 어무이, 제발 다시 생각하이소. 이 험난한 세상에 우에 살라고….”
“이 천지사방에 내 한 몸 의지할 데 엄껜나? 내사 마 속이 다 시원하다.”
“아무리 그래도…할급휴서(割給休書)라니….”
“그래두 선선히 할급휴서(割給休書) 받아온 게 우덴데?”
“딴은 그렇심더. 그래야 재혼을 하던, 보쌈을 당하던 할끼 아닙니꺼?”
“보쌈? 지랄 쌈치지 마라.”
“에…보쌈 안당하실 겁니꺼?”
“미친나? 이 나이 묵고, 보쌈 당하라꼬?”
“규진이 어무이 아직 서른도 안됐잖슴니꺼? 재혼 안하실 겁니꺼?”
“재혼 해야제! 재혼할라꼬, 할급휴서(割給休書)까지 챙겨 온 거 아이가.”
“그라믄, 보쌈으로….”
“네, 보쌈 묵고 싶나? 와 입만 열면 보쌈이가? 보쌈 못 먹어 환장했나? 하나 시켜줄까?”
“그…그게 아이고, 성님두 살길을 찾아야 하는 거 아입니꺼?”
“내 걱정 하지 말그레이. 내일 일찌감치 성황당 앞으로 나갈거니까…신경 꺼라.”
“참말입니꺼? 그라믄 지금 후딱 소문을 내야 겠네에?”
“소문? 네 지금 내 팔자 막을라꼬 작정을 했나? 소문은 무신 소문!”
그랬다. 이 당시 소박을 당하거나, 이혼을 한 여성들은 인생의 마지막 운을 걸고 성황당 앞으로 향했는데, 바로 습첩(拾妾 : 한자 풀이 그대로 하자면, ‘첩’을 줍다가 되겠다)을 위한 기본 자세였다. ‘습첩’이라 함은, 한자 풀이 그대로 첩을 줍는다는 것인데, 새벽녘에 성황당 아래에서 여자가 기다리고 있으면, 이 여자를 발견하는 첫 번째 남자가 이 여자를 데려간다는 것이다. 아니, 말은 바로 해야겠는데…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데려가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아따…아줌마. 지는 집에 가믄 토끼 같은 자식새끼에, 여우 같은 마누라가 기다리고 있다니께유….”
“그게 나랑 뭔 상관이여? 네가 지금 이 신새벽부터 성황당을 지나가니까 그렇지…네가 지금 맨 처음 날 봤잖여. 안 그려? 그려 안그려?”
“봐…봤쥬….”
“그라믄, 이것이 관습헌법적으루다가 네가 날 책임져야 하는 거 맞어, 안맞어?”
“그…그거야 맞기는 맞는 말인디….”
“그란데 왜 안 데려가는 겨? 여기 나비도 있겠다…. 몸 튼튼하겄다. 인물 이정도면 괜찮겠다. 뭐가 불만인디?”
“그…그것이 지가 유부남인지라….”
“유부남하고, 습첩이 뭔 상관관계여? 무조건 데려가야 하는겨!”
이랬던 것이다. 자, 문제는 이 습첩이란 것이 이혼을 한 여자에게 있어선 인생역전, 일발필살의 로또와 같은 마지막 기회였다는 것이다. 왜? 성황당을 지나가는 남자는 그 귀천에 상관없이 무조건 이 여자를 데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잘하면 양반이나…. 진짜 재수 좋아 이몽룡 같은 암행어사라도 만나는 날에는 말 그대로 인생역전이란 것이다.
“네 단디 들으라…. 지금 내 이혼했다꼬, 벌써 소문 쫙 났을끼다…홀아비나, 노총각 애네들이 보쌈하겠다고 덤빌낀데…성황당에 이미 이놈들이 딱하니 지킬 것이다…내는 이놈들 하고 또 살 부대끼며 살고 싶지 않다.”
“그라믄 우얄낀데예?"
"네 여즘 갱상도에 암행어사 떳다는 소문 몬 들었나?“
“들었습니더. 앗! 행님! 암행어사 노리는 겁니꺼?”
“인생 두 번 있나? 이 한번에 질러 버리는 기다.”
“암해어사가…걸리겠습니꺼?”
"이판사판 공사판 아이가? 성황당 근처에 몰래 짱 박혀 있다가…허름한 차림의 양반 보면 확 덮쳐뿌리는 기다.“
“아따…마 행님 구체적이시네….”
“기둘리라. 내 인생역전 하고 말끼다.”
이리하여 규진母는 그길로 성황당 근처에 짱 박혀 있는데…마을 홀아비나 노총각들이 눈에 불을 켜고, 성황당 근처를 샅샅이 졌으나, 규진母는 요리조리 이들의 시선을 피해 끈덕지게 양반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드디어 허름한 차림의 양반 한명이 고갯길을 건너오는데….
“거기 가는 양반 스톱! 정지 하입시더!”
“뭐꼬?”
“잠시 검문검색이 있겠심더. 혹시 암행어사 아입니까?”
“네 미친나? 암행어사가 내 암행어사라 하고 돌아댕기는 거 봤나?”
“그라믄…양반입니꺼?”
“그라믄 우짤낀데?”
“축하 합니다. 콩코레이츄레이션입니다.”
“이기 뭔 귀신씨나락 까묵는 소리꼬?”
“지는예, 사정파의(事情罷議)한 이혼녀입니더. 이건 사정파의 했다는 증명서고예…. 틀림없는 나비지예?”
“...네 지금 네 데려가라는 소리인가 본데...내는 찢어지게 가난해서 과거도 몬보는...”
“상관 없습니더. 과거는 이미 다 보신 거 아입니꺼? 선수끼리 와 이러십니꺼?”
“네 지금 뭐하자는 플레이꼬? 이 손 못 노나?”
“못 놓심더. 선비님은 습첩도 모르십니꺼? 지는 절때루 선비님 못놓심더!”
그렇게 규진母는 그 선비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데…척하니 보시면 알겠지만, 조선시대 이혼은 여성에게 상당히 불리했다. 뭐 양반보다야 평민쪽이 좀 더 자유롭다 하겠지만, 이것도 따지고 보면, 남성 편의주의적 발상의 이혼인지라 오십보 백보라 해야 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건 참으로 힘들다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지금이다.
자료출처 : 스포츠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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