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논길 - 고은
벌써 별 하나 떠 이 세상이 우주이구나
마른 풀 냄새 한철인 마을에도
아껴 쓰는 전등불빛 여기저기 돋아난다
나는 돌아가서 저녁 논길 외오 걸으면서
달겨드는 저녁 논길 외오 걸으면서
달겨드는 밤 물컷 이따금 쫓고
한편으로는 엊그제 흙에 묻힌 남동이 영감을 생각한다
죽음이 산 사람의 마음을 깊게 하는지
나도 그 영감 생시보다도 손톱만티 달라져야겠구나
어둠에 더욱 정든 논 두루 돌아다보아라
지난 해보다 도열병 성해서 얼마나 품도 애도 더 먹었는지
여든 여덟 번이나 손이 가는 농사가 1년 농사 아니냐
아무리 쌀 농사 헛되고 빚지는 가을이건만
가을은 가을답게 부지깽이도 덤벙대도록 바쁘다
진정코 여기서 떠날 줄 모르고 놀 줄 몰랐다
살아 보면 세월은 사람에게 큰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가장 작은 것이다
돌아가는 길 저녁 논길이 오늘따라 으리으리하게 조용하구나
가물에도 뒷장마에도 병충해에도 실컷 커서
말없이 이삭 팬 벼가 우리에게 어른이 아니고 무어냐
어서 가자 가서 매흙냄새 나는 이 몸으로
내 새끼 한 번 겨드랑 받쳐 번쩍 어둠 속에
들어올렸다 넉넉잡고 한 나라로 내려놓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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