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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피치] 군웅할거·영웅탄생 … 관중 창조 비결은 끝없는 '천일야화'

---Inside Pitch

by econo0706 2022. 9. 23.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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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06. 26 

 

프로야구가 후끈 달아올랐다. 지난해 600만 관중 돌파에 이어 올해는 시즌의 반도 지나기 전에 30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직장 동료끼리, 가족·친구·연인끼리 야구장에 가는 게 일상이 됐다.

 

출범 30년을 맞은 프로야구가 ‘국민 스포츠’가 된 이유는 뭘까. 야구에 빠져들게 만드는 스포츠로서의 본질적인 매력이 있을 것이다. 체육철학자인 김정효(47) 박사는 기호학적인 접근을 한다. ‘압구정동’이라는 말에는 ‘서울 강남구에 있는 동’이라는 의미와 ‘한국 사회의 압축성장’이라는 상징이 함께 들어 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야구에 들어 있는 각종 기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캐낼 수 있다는 것이다.

 

프로야구를 기호학으로 풀어보려는 여정에 이태일(46) 엔씨소프트 야구단 대표이사가 동행했다. 중앙일보 야구전문기자 출신인 이 대표는 30년 넘게 지켜온 야구 현장의 생생한 사례들을 풀어냈다. 서울 삼성동 엔씨소프트 사옥에서 열린 대담에서는 야구를 둘러싼 풍성한 담론이 펼쳐졌다.
 

페넌트레이스-이벤트의 일상화

 

▲ 이태일 베이스볼 키드로 시작해 프로야구단 수장에 오른 인물. 고려대 서어서문학과를 졸업한 뒤 LA 다저스에서 연수했다. 중앙일보 야구전문기자 시절 야구칼럼 ‘인사이드 피치’를 262회 연재했다.

 

김 박사(이하 김): 프로야구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생산해 내는 ‘서사 구조’를 갖고 있다. 프로야구는 ‘페넌트레이스’라는 시즌이 봄에서 가을까지 이어진다. 월요일을 빼고 매일 경기가 열린다. 이벤트의 일상화다. 프로야구 시즌 시작을 ‘대장정의 막이 올랐다’고 표현한다. 대장정은 영웅담이고 서사시와 같다. 군웅이 펼치는 흥미진진한 모험과 대결이 있다. 무협지나 서사시는 완결된 구조에 허구성을 바탕으로 하지만 프로야구는 현실의 사람들이 펼치는 이야기다. 그 속에 드라마가 있다.

 

이 대표(이하 이): 매일 경기를 한다는 게 일상성을 만든다. 해가 떨어지면 야구를 보고, 아침에는 전날 경기 얘기를 하고, 오늘은 어떤 승부가 펼쳐질까 예상하고, 해가 떨어지면 또 야구를 보고…. 야구는 단막단막 끊어지는 연속극과 같다. 타자와 투수, 1회 초와 1회 말, 경기 대 경기, 시즌 대 시즌, 지난 30년의 역사가 연결된다. 30년 전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데려갔던 잠실야구장에 오늘 내가 아들을 데리고 가서 “얘야, 야구란 말이다”라며 얘기를 들려준다.

 

김: 프로야구는 일상의 밤의 문화를 지배한다. 이렇게 되기까지 빠트릴 수 없는 게 스포츠 채널의 정착이다. 초창기 프로야구는 토·일요일 낮에만 중계됐다. 그나마 ‘정규방송 관계로 중계를 마친다’는 지상파의 폭력에 무방비로 당했다. 이제는 언제든 자신이 원하는 팀의 경기를 볼 수 있다. 매일 게임을 보고 팀에 몰두하면 야구가 전해 주는 메시지와 이야기성에 빠져들게 돼 있다.

 

이: 그렇게 된 건 얼마 전이다. 2005년 4월만 해도 3개 스포츠 채널에서 프로야구 중계는 한 경기밖에 없었다. 방송사가 ‘이건 사람들에게 보여줘야겠다’고 한 계기는 2006년 WBC였다. 콘텐트로서 경쟁력을 갖춘 게 몇 년 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건 팬들의 동력 때문에 가능했다.

 

라이벌의 형성-갈등구조

 

▲ 김정효 서울대 체육교육과를 졸업하고 일본 쓰쿠바대에서 체육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스포츠 현상에 대한 철학적·사회학적 고찰에 매진하며, 한국체대·서울대 박사 과정에 출강하고 있다.

 

김: 서사 구조에는 갈등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프로야구는 이 갈등구조가 아주 잘 짜여 있다. 바로 라이벌이다. 예전에는 지역, 모기업 등 빤히 보이는 구도였다. SK가 들어오면서 다양한 구도가 만들어졌다. SK가 3년 정도 독주하면서 이를 견제하려는 전선이 형성됐다. 요즘은 넥센과 LG가 만나기만 하면 혈전을 벌인다.

 

이: SK는 LG와 ‘사람의 이동’을 둘러싼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김성근 감독, 민경삼 단장, 이상훈·김재현 등이 LG에서 SK로 옮겼다. 두산과 SK는 한국시리즈 등 포스트시즌에서 단골로 만나면서 ‘실력 라이벌’이 됐고, 이는 한국 프로야구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 라이벌은 상대를 모욕하거나 폄하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 인정하고 존중할 때 만들어진다. 9구단으로 출범하는 창원 다이노스는 지역 구도상 롯데와 숙명의 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

 

김: 프로야구의 라이벌 구도는 필연적으로 고교야구의 존재와 맞닿는다. 고교 시절 라이벌 팀이나 선수는 프로에 와서도 숙명적으로 만난다. 야구 생태계가 풍성해지기 위해서는 고교야구가 좀 더 활성화돼야 한다.

 

이: 고교야구의 키워드는 ‘청춘’이다. 프로야구는 ‘기성’이다. 청춘은 가치관과 비전을 형성하고 추억을 만드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기다. 일본 고시엔 야구가 먹히는 것도 이런 청춘과 열정이라는 모티브가 있기 때문이다.

 

▲ 롯데 팬들은 상대 투수가 견제구를 던질 때마다 “마!” 소리를 질러 투수를 압박한다. 지난 5월 사직야구장을 찾은 김정효 박사는 “수만 명이 일제히 일어나 ‘마!’를 외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고 말했다. / 중앙포토 

 

아이콘과 아이덴티티-팀 색깔

 

김: 서사 구조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인물의 성격이다. 프로야구가 30년을 내려오면서 팀의 성격이 만들어졌고, 이는 서사성을 강화시킨다. 그런데 막내 팀인 넥센은 아이콘이 아직 없다. 선수보다는 김시진 감독, 정민태 코치, 심지어 캐릭터 인형인 턱돌이가 더 부각됐다. 이대호-자이언츠(거인), 김동주-두목곰 등은 딱 떨어지는 아이콘이다.

 

이: 우리는 공룡이라는 아이콘을 통해 팀 아이덴티티를 만들어 가려고 한다. 프로야구 출범 때 ‘어린이에게 꿈을’이라는 모토를 내세웠다. 전설 속의 동물인 공룡은 사람들에게 몽환적인 느낌, 잊고 살았던 꿈과 향수 등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어린이에게는 선망의 대상, 어른에게는 향수의 대상인 팀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경남 고성에는 공룡 발자국도 있다.

 

김: 팀 아이덴티티는 롯데가 가장 강력하다. 롯데의 응원문화는 부산이라는 지역공동체 의식이 조직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마!’ ‘쌔리라’는 지역 사투리인데 짧고 강하면서도 투쟁적이다. 지난달에 ‘마!’ 한번 하고 싶어서 사직에 갔다. 상대 투수가 견제구를 던지면 수만 명이 일제히 ‘마!’를 외치는데 소름이 쫙 돋았다. ‘마!’는 엄밀히 따지면 경기 방해 요소이자 홈 텃세다. 롯데 팬들은 ‘사직에 왔으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생각한다. 관중이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경기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주체가 된다. ‘쌔리라’는 번트나 볼넷 따위는 싫고 화끈한 공격야구를 하자는 의식의 표현이다. ‘아주라(파울볼 아이 줘라)’는 ‘파울볼을 애한테 주지 쩨쩨하게 그거 갖고 가서 뭐 할래’라는 지역정서를 나타낸다.

 

이: 롯데의 응원문화는 프로야구에 매우 유익하다. 그만큼 팬 충성도가 높다는 뜻이다. 롯데가 성적이 좋지 않을 때도 꾸준히 야구장을 지켰던 관중이 지금의 사직 100만 관중을 견인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큰 책임감을 느낀다. ‘우리가 야구 하니까 팬들은 당연히 와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사이의 미학-상상력

 

김: 서사 구조는 이항대립적이다. 선과 악, 행운과 불운, 우연과 필연이 맞선다. 야구도 이항대립적 요소가 이어진다. 투수와 타자, 볼과 스트라이크, 세이프와 아웃, 이런 것들이 엮이면서 얘기를 만들어낸다. 야구는 모든 동작이 하나하나 끊어지고 다시 연결된다. 긴장과 이완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사이의 미학’이다. 여기에 상상력이 끼어든다. 투수가 공을 던지기 직전 ‘바깥으로 하나 뺄 거야’ ‘인코스 뚝 떨어지는 것 던지겠지’ 등 상상을 한다. 원아웃 1, 2루에서 공격팀은 싹쓸이 2루타, 수비팀은 더블플레이처럼 각자 최상의 시나리오를 상상한다.

 

이: 사이의 미학이라는 표현이 좋다. 팬들이 상상력을 발휘하는 동안에 TV 중계에서는 해설자의 내러티브가 이어진다. 전문가의 상상력이다. 이런 상상력 속에서 풍부한 알레고리가 탄생했다. ‘야구는 9회 말 투 아웃부터’ ‘위기 뒤에 찬스’ 같은 표현이다. 이는 인생의 불확실성을 반영한다.

 

김: 야구의 또 다른 특성은 임장성(臨場性)이다. 야구장에 가서 생생하게 현장을 느끼고, 그 드라마의 순간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TV로 야구를 볼 수도 있지만 ‘마!’ 소리를 지르고, 좋아하는 선수의 피켓을 흔드는 건 현장에 가서야 의미가 있다.

 

이: 프로야구가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찬스 뒤에 위기’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가장 인기 있던 스포츠가 하루아침에 몰락한 사례도 있다. 스포츠의 본질적 가치를 지키는 데 충실해야 한다. 프로야구가 지금까지 유지해 온 깨끗함·공정함을 놓쳐서는 안 된다. ‘나만 살아야겠다’는 구단 이기주의를 벗어나 동업자정신을 가질 때 프로야구는 더 발전할 수 있다.

 

진행·정리=정영재 스포츠에디터 jerry@joongang.co.kr

 

자료출처 : 중앙SU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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