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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피치]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이야기하련다

---Inside Pitch

by econo0706 2022. 9. 24.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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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09. 08 

 

비가 오고 있었다.

 

그 비는 경기를 지연시키고 있었다. 운동장에 모인 관중은 갈팡질팡했다. 경기가 언제 시작될지 몰라서였다. 중계방송이 예정된 아나운서도 그랬다. 좀처럼 그칠 것 같지 않은 비였다. 라디오 방송은 아예 현장과의 연결을 끊었다. 그리고 다른 방송을 연결했다.

 

 

지난 1일 미국 텍사스주 라운드락의 델 다이아몬드 구장. 선수들도 비 때문에 클럽하우스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저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TV를 보거나 가볍게 몸을 풀고 있었다. 이렇게 비로 경기가 지연될 때 가장 갑갑한 선수가 선발투수다. 언제 시작할지 모르는 경기를 위해 컨디션을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4일간 준비한 선발등판이 수포로 돌아갈지 모르는 상황과 당장 상대 타자를 맞이해야 하는 상황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렇게 2시간30분이 지나갔다. 웬만한 야구경기가 끝나는 시간이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비가 그쳤고, 관중이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웰컴 투 델 다이아몬드 파크!” 방송국 아나운서의 목소리에도 생기가 돌아왔다. 선수들이 하나 둘씩 그라운드로 나왔다. 그리고 맨 마지막.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때론 빗속에서 뛰고, 때론 불펜에서 공을 던지며 몸을 풀고 있던 그날의 선발투수가 마운드를 차지했다. 박찬호(34)였다.

 

135.2

 

그날은 박찬호의 시즌 마지막 등판이었다. 일부에서는 마이너리그 시즌이 끝나고 메이저리그 로스터가 40인으로 늘어나면서 박찬호가 빅리그로 올라갈 기회를 잡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지만 그의 시즌은 이미 마이너리그에서 끝내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어했다.

 

그는 1회 초 첫 타자에게 홈런을 맞았다. 그러나 무너지지 않았고 7이닝을 3실점으로 잘 막았다. 삼진을 9개나 잡아냈다.

 

앞선 등판에서도 그랬다. 그는 첫 타자에게 홈런을 맞았지만 7이닝 동안 1실점으로 탄탄하게 마운드를 지켰고 11개의 삼진을 잡아냈었다. 맞고 시작하면 강해지는 징크스를 보인 박찬호. 그는 마지막 두 경기에서 공의 위력을 되찾은 걸까.

 

“정말 컨디션이 좋고, 잘 던졌다고 생각하는 날 오히려 맞았다. 공이 좀 손끝에 채인다 싶으면 조금 더 해보고, 또 조금 더 해보고 싶은 것이 생겼다. 그러다 맞았다. 완전하지 못한 공이었다. 먼저 한 방 맞고 시작하면 달랐다. 신중해졌다. 아, 움츠러든다는 의미는 아니다. 타자가 숨죽이고 기다리면, 내가 과감하게 찔렀다. 마지막 두 경기에서는 그런 템포 조절이 잘 통했던 것 같다”

 

6승 14패, 24경기에서 135.2이닝 투구. 164안타 90자책점. 평균자책점 5.97. 그날 마운드를 내려온 박찬호가 받아 든 마이너리그 트리플A 성적표다. 이 숫자 가운데 박찬호가 의미를 두는 숫자는 135.2. 올해 던진 투구이닝이다. 그가 시즌 초반 목표로 잡았던 200이닝에는 한참 모자랐지만 그건 메이저리그 붙박이 선발투수가 됐을 때의 가정이었다. 그는 아프지 않고, 꾸준히, 오랜 이닝을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보여주고 싶어했다. 지난해 장출혈 이후 그의 그런 능력에 대해 주위에서 고개를 갸웃거렸고 스스로도 확신을 갖지 못했다. 그가 마지막 2경기에서 연속 7이닝을 던진 데 의미를 두는 이유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올해 난 특별한 경험을 했다. 그것도 많이. 알 수 없는 미로 속에서 길을 잃었던 것도 같다. 그러나 그 미로 속에서 어떤 빛을 보았다. 그 빛은 분명 밖으로 나가는 출구가 있다는 뜻 아니겠나. 나는 그걸 보았다.”

 

▲ 박찬호와 노모 히데오 / 연합뉴스

 

Nomo? No more?

 

3년 전쯤인가.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어쩌면…나도 노모처럼 될지 몰라요”라고. 일본의 야구영웅 노모 히데오(39) 얘기였다. 그때 노모는 메이저리그 신인왕, 올스타 등의 화려한 경력을 뒤로하고 마이너리그에서 재기를 노리고 있었다. 받아주는 팀이 없어 초청선수로 스프링캠프에 참가하고, 그 뒤에 다시 방출과 마이너리그행이 계속됐다. 그래서 ‘천하의 노모’가 저런 대접을 받으면서까지 야구를 계속하는 이유가 뭐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때 그가 그렇게 대답했다. “어쩌면 나도 노모처럼…”이라고.

 

“내년 제 목표는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것보다 우선, 어느 곳에 있든 좋은 투수로 거듭나는 겁니다. 요즘은 내 자신을 믿는 연습을 해요. 생각하는 모든 것을 메모하고, 현실을 인정하고 그곳에서부터 나아지는 나를 만들어 가야겠다고 생각하죠.”

 

그렇다 노모처럼. 메이저리그에서 113승을 올린 박찬호. 노모와 절친하기도 한 그는 노모가 갖고 있는 메이저리그 동양인 최다승(121승)을 넘어서고 싶어했다. 노모를 숫자로 앞서는 데 집착했다. 그러나 지난해 장출혈과 올해 마이너리그에서의 1년을 통해 그는 숫자가 아닌 다른 것. 도전과 희망이라는 원래의 목표를 되찾은 것 같다.

 

그는 내리는 빗속에서 멈추지 않았다. 뒤로 지나간 시간이 많아져도 뒤돌아보기보다 앞으로 나아갔다. 아무도 그에게 “이제 그만(No more)”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 같다. 그가 스스로의 발걸음을 멈추기 전까지는.

 

그는 ‘할 만큼 한 것 아니냐’는 주위의 우려를 향해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이야기하련다-후략(기형도 시인 ‘정거장’의 첫 구절)”라고 .

 

이태일 / 네이버스포츠팀장

 

자료출처 : 중앙SU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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