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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아트 덩커’ 김효범의 생애 첫 FA, 그리고 대박

--민준구 농구

by econo0706 2022. 11. 12.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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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05. 03. 

 

“한국인의 피를 가진 이들 중 가장 화려한 선수였다.”

2000년대 초반, 한 동양인의 화려한 덩크 영상은 수많은 대한민국 농구 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현재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덩크에 대한 환상이 컸던 팬들의 마음속에는 ‘브라이언 킴’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브라이언 킴, 즉 김효범은 한국인 부모 사이에 태어났으며 초등학교 5학년 시절, 가족 전체가 캐나다로 이민을 가면서 국적까지 취득했다. 이후 캐나다 내에서 농구 유망주로 꼽힌 김효범은 NCAA 디비전Ⅰ 소속인 포틀랜드 대에서 뛰었으며 이후 NAIA리그의 뱅가드 대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캐나다 내에서의 김효범은 좋은 선수 그 이상의 평가를 받았다. 특히 2003년에는 캐나다 국가대표 예비 엔트리에 포함되기도 했으며 유니버시아드 대표팀에 선발 요청을 받기도 했다.

국내 진출 의사를 밝힌 김효범은 KBL 드래프트 참가 의사를 전했고, *해외동포선수 규정에 의거 2005 KBL 국내 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방성윤에 이어 전체 2순위로 울산 모비스에 지명됐다. 이미 국내 팬들은 김효범의 화려한 덩크 영상에 매료됐고, 그의 국내 진출을 반기기도 했다.

*KBL은 2005년 국적과 관련된 논란의 소지를 미연에 방지하는 취지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해외동포와 혼혈선수의 KBL 신인 드래프트 참가를 허가했다. 그 결과, 김효범과 김경언을 시작으로 문태종, 문태영, 이승준, 이동준, 박승리, 원하준, 박태양 등의 선수들이 KBL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하자 2016년 8월 18일 결국 대한민국 국적자가 아닌 선수들의 신인 드래프트 참가를 제한했다.

김효범의 첫 시즌과 두 번째 시즌은 아쉬움만 가득했다. 지명 후, 곧바로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아야 했고, 재활을 마친 상황에선 기존의 운동 능력을 다소 잃은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세 번째 시즌이었던 2007-2008시즌부터는 평균 득점이 두 자릿수로 오르며 조금씩 위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모비스는 2005-2006 정규리그 우승, 2006-2007 통합우승을 차지하면서 정상권에 오른 강팀이었다. 하지만 에이스 양동근이 입대했고, 故크리스 윌리엄스마저 떠나며 전력 누수가 심각했다. 김효범은 팀의 위기를 기회로 생각했고, 확실한 주전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2007-2008시즌, 김효범은 53경기 출전해 평균 11.4득점 2.1리바운드 1.5어시스트를 기록했다. 2008-2009시즌은 54경기 출전, 12.1득점 1.8리바운드 2.4어시스트, 2009-2010시즌 역시 54경기 출전, 11.0득점 2.1리바운드 1.2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황금기를 맞이했다. 특히 2008-2009시즌에는 생애 첫 올스타는 물론 덩크, 3점슛을 모두 석권하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시즌 베스트5 역시 김효범의 차지였다.

2009-2010시즌, 모비스와 혈전을 펼쳤던 KCC의 송원진 경기운영 팀장은 “당시 김효범은 정말 대단한 선수였다. 선수 인생에서 정점을 찍었던 시절이었고, 돌파나 3점슛 등 위협적인 부분이 많았다. 챔피언결정전 때도 많이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고 회상했다.

SK에서 한솥밥을 먹게 된 주희정 고려대 감독 대행 역시 “팀 전술에 대한 이해도는 떨어질지 몰라도 개인 능력은 최고였다. 특히 탄력은 지금 젊은 선수들, 특히 대학 선수들보다도 더 좋았다”고 이야기했다.

주가가 급상승한 김효범은 2009-2010시즌 이후 FA 자격을 취득하게 된다. 당시까지만 해도 유재학 감독과 김효범의 궁합에 대해 각기 다른 평가가 있었던 만큼, 김효범의 잔류와 이적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

당시 김효범의 기량은 물이 오를 대로 올라 있었다. 특유의 탄력을 이용한 덩크, 화끈한 돌파와 깔끔한 마무리, 거리를 상관하지 않았던 3점슛은 김효범의 가치를 끌어올렸다. 더불어 유재학 감독, 그리고 모비스에서 수비력까지 키우며 국가대표급 선수라는 평가까지 받았다.

거물급 FA를 노리던 SK는 방성윤과의 계약이 틀어지면서 곧바로 김효범을 선택했다. 그 결과, 김효범은 5년 계약 및 첫해 보수만 5억 1천 3백만원으로 김주성에 이어 연봉 랭킹 2위에 오를 수 있었다(당시 김주성의 연봉은 6억 9천만원).

사실 SK는 방성윤과의 재계약을 원했지만, 금액 차이가 컸다. 이 때문에 슈터 공백을 메꾸기 위한 자원을 찾았고, 김효범 역시 모비스와 틀어지면서 손을 맞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김효범의 이적은 과거 신기성, 현주엽의 FA 이적 이후 가장 큰 사건 중 하나가 된다.

아쉽게도 김효범의 전성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SK에서의 첫 시즌은 평균 15.1득점을 올리는 등 나름 성공적이었지만, 이후 무릎 부상과 허리 디스크 재발로 인해 급격히 하락세를 보였다. 결국 좋은 모습을 길게 이어가지 못했고, 2012-2013시즌 도중 KCC로 트레이드됐다.

2016-2017시즌, 다시 친정 모비스로 돌아온 김효범은 쏠쏠한 활약을 펼치며 아직 건재함을 증명했다. 그러나 신흥 에이스 이대성이 떠오르면서 자연스레 세대교체가 이뤄졌고, 김효범 역시 은퇴의 길을 걷게 됐다. 그러나 김효범에게 있어 농구는 소중함 그 자체였다. 평소 농구에 관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그는 G-리그 소속 그랜드 래피즈 드라이브의 코치가 됐다.

주희정 대행은 “농구 자체를 사랑했던 사람이다. 선수 중에선 보기 드물게 이론적인 공부도 많이 했었던 기억이 있다. 얼마 전에 전화가 왔는데 코치를 한다고 하더라. 잘할 것 같다고 이야기해줬다”고 말했다.

국내농구에 큰 충격을 안겼던 김효범은 이제 선수들의 삼촌이자 형님인 코치가 되어 지도자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현재 호주에서 농구 유학 중인 이현중 역시 김효범의 도움으로 NBA 아카데미에 입성할 수 있었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역대 국내선수 중 가장 많은 덩크를 성공한 가드. 패턴 플레이가 아니어도 상대 수비를 무너뜨릴 수 있음을 알려준 김효범을 어찌 쉽게 잊을 수 있을까. 선수로서의 전성기는 짧았지만, 코치로서의 인생은 탄탄대로이기를 바란다.

 

민준구 기자 minjungu@jumpbal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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