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의 숫자가 넘어간다. 12:59에서 0;00으로.
아하! 이제부터 내일이구나…. 아니, 이제부터 오늘이구나…. 새해가 왔다는 소리구나.
그렇구나. 2007년 1월 1일이라는 얘기로구나.
창 밖을 내다봤다. 뭐가 달라졌나?
똑 같다. 어제의 밤하늘이나, 오늘의 밤하늘이나…
하지만 구름 낀 하늘은 어제가 아니고 오늘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멀리서 들려오는 함성은 제야(除夜)의 종소리의 여운(餘韻)이련가.
그들은 새해의 무엇을 보았기에 저렇듯 환호성(歡呼聲)을 올리는가.
가고 오는 것은 자연(自然)이고 세월(歲月)일진대, 인간(人間)이 그것에 선(線)을 그어 놓고, 먼저 해는 가고 새해가 온다고 한다.
기왕 선을 그으려면 따뜻한 봄날에, 만물(萬物)이 소생(蘇生)하는 그 봄날에 그을 것을…. 왜 온 천지가 꽁꽁 얼어붙은 한 겨울에 금을 그어놓고 환호를 하는 것일까.
하지만 원하던, 원치 않던 또 한 해는 오고야 말았다.
2007이라는 생경스러운 숫자가 또 한 해 동안 나, 너 그리고 우리 모두를 지배하겠지.
돌이켜 보면, 그 숫자에 묶여 살아 온 세월도 어느덧 50해가 넘었다. 그리고 그 숫자들은 하나하나 나의 인생을 묶으며 기억(記憶) 속에 파고 들어있다.
내가 처음으로 그 숫자에 눈을 뜬 것은 아마도 국민학교(國民學校) 4학년 때인 것 같다. 산수 시험문제에 나왔던 1965년. 그것을 읽는 방법을 한글로 적는 것이 문제였고, 나는 일천구백육십오 년이라고 적었다가 붉은 색 줄을 맞았었다. 정답은 천구백육십오 년. 하지만 나는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일천이 아니고 그냥 천인지가.
그 당시 우리집 표준말에 의하면 일천이 맞는 것이었다. 할머니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 일천구백육십오 년이라고 하시는데, 왜 틀리는 건지.
아마도 산수 시험 20문제 중 그것 하나 틀려서 95점을 맞았던 것이 억울하여 상당히 오랜 시간 우울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후 우리집 표준말에 변화가 있었다. 천구백육십오 년이 우리집 표준말이 된 것이다.
아들의 경기중학 입학이 집안의 목표였던 그 당시에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무즙으로 엿을 만들어 시교육청 앞에서 데모를 하고, 그 압력에 추가 합격생을 내던 때가 그때였으니….
여하간 그 후 내 기억 속에서 일천구백…은 없어지고 말았다. 그냥 천구백, 그나마도 이젠 구십팔 년, 구십구 년으로 지칭(指稱)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일천구백팔십 년이면 어떻고 천구백팔십 년이면 어떠하리. 아니 그냥 팔십 년이라고 한다고 광주(光州)의 그 사건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만행(蠻行)이 용서(容恕)되는 것도 아닌 것을.
그저 무심(無心)히 지나는 세월을 인간이 붙잡아 놓고, 칠십구 년이니 팔십 년이니 이름을 붙여 자기들끼리 짖고 까불고….
하지만 나 역시 그 숫자에 얽매이지 않을 수 없이 살았다. 1956. 1957. 1958. 1963. 1975. 1977. 1979. 1980. 1985. 1986. 1991. 2001. 2004… 별 하나에 이름 하나가 아니라 숫자 하나에 사건 하나씩.
어쩌랴, 그것이 인간인 것을…
하지만 새해에는, 2007년에는 숫자가 나를 얽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숫자에 의미(意味)를 주는 한해가 되도록 해 보자. 2007년에 의미가 있는 일이 아닌, 내 인생에 2007년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그런 한 해를 만들어 보자꾸나.
돼지조차 웃고 마는 황금돼지해가 아니라 내 스스로 이루어 나가는 복돼지해를 한번 만들어 보자꾸나!
그것이 인간이 추운 겨울의 한 가운데에 금을 그어 놓은 의미일지니….
2007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