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부르는 민요에 승경가라는 게 있었다.
서열로 돼 있는 벼슬 자리를 아랫벼슬부터 윗벼슬로 차례로 불러 올리는 노래다. 한말에 유행 했던 그 승경가에 다음과 같은것이 있었다.
원님 위에 감사/감사 위에 참판/참판 위에 판서/판서 위에 삼정승/삼정승 위에 만동묘지기/만동묘지기 위에 금송아지대감 .
임금님 다음으로 높은 벼슬인 삼정승 위에 두개의 벼슬이 더 있다는 것은 정승보다 더 큰 특권을 가진 자가 판치고 있었다는 당내의 부조리를 풍자하고 있음을 알겠다.
만동묘는 청주 화양동에 있는 사당(祀堂)으로 임진왜란 때 원병(援兵)을 보내어 도와준 명나라 신종을 모심으로써 중국사대의 성지처럼 여겼던 현장이다. 따라서 만동묘지기도 조선사람들의 사대주의(事大主義)를 배경으로 기고만장하여 정승 판서를 깔보는 형편이었다. 흥선대원군이 만동묘의 계단을 오를 때 하인들로 하여금 겨드랑이를 끼고 부축하게 했다하여 발길질하여 굴러떨어지게 했을 정도라면 알아봄직하다. 이 만동묘지기보다 더 높은 이가 바로 임금님의 내탕금(內帑金)을 주물렀던 내장원경이요, 내장원경의 별칭이 금송아지 대감이다. 내탕이란 송나라 때 임금님이 쓰던 궁정의 금궤를 뜻하며 그후 임금님이 쓰는 재용을 내탕이라 일컬었던 것이다.
중국의 마지막 황제 부의의 가정교사로 자금성에서 더불어 생활을 했던 영국인 존스톤의 기록에 보면 중국의 황제란 낮에는 돈태감, 밤에는 살태감이 숨어서 조작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했다. 돈태감은 내탕금담당 내시(內侍)이며 살태감은 여색담당 내시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외일수는 없다. 한말 국내금광의 채광권(采鑛權)을 독점, 고종의 왕실 내탕을 한손으로 주물러 치부(致富)한 이로 이용익을 들 수 있다. 임금에게 금송아지를 바쳐 금송아지 대감이란 악명을 남긴 바로 그 장본인인 것이다. 순종 때는 윤비의 큰아버지인 친일파 윤덕영이 내탕금을 횡령하고 망명한 사건은 유명하다. 내탕에는 이렇게 검은 그림자가 따르게 마련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여 내탕금이 클수록 정치의 질이 악해지고, 적을수록 질이 좋아졌음을 적시(摘示)해두고자 한다. 조선왕조에서 상대적으로 내탕금을 적게 쓴 임금은 대궐을 피해 오두막을 따로짓고 기거했다던 세종과 무명과 베옷을 상복했다던 성종, 그리고 네댓가지 소찬만으로 수라를 들었다던 선조 세 분이시다. 그 모두 명군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다.
청와대에서 일상에 쓰는 살림값을 대폭으로 줄여쓰기로 한 것은 내탕사례로 보아서 긍정적이다. 다만 그 의지의 영속(永屬) 여부를 지켜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