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3백년 조나라의 무령왕은 오랑캐와 싸우기 위해서는 병사들에게 간편한 호복(胡服)을 입히기로 마음을 먹었다.
곧 정통적인 원피스 군복을 오랑캐의 투피스 군복으로 개혁하자는 이 임금의 뜻에 모든 대신들이 불복을 했다. 이유는 고귀한 중화(中華)의 나라에서 비천한 오랑캐의 문화를 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대신들이 호복을 채택하고서 만고의 역적이 되느니 대신자리를 그만 두겠다 하여 출사(出仕)마저도 하지 않았다. 이에 임금은 이 대신들을 직접 집으로 찾아 다니며 그의 개혁의지를 설득했다.
이처럼 중국에는 새로운 문물이나 제도가 아무리 필요불가결하더라도 그것을 취하는데는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서양의 총이 중국에 전래된 것은 1514년의 일이다. 한데,그 편리하고 유익한 이기(利器)는 그 80년 후인 임진왜란 때까지도 실용화되지 않고 있었다. 중국에서 그 총이 처음 쓰인 것은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일어설 때 였으니 전래된지 1백50년 후의 일인 것이다. 만만디도 유만부동이다. 과학기술뿐 아니라 유행-사상-제도까지도 매한가지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유행했다하면 몇달 며칠만에 유행하는 양은냄비식의 우리 문화섭취 체질과 비교해 봄직한 것이다.
지난 주 중국에서 막을 내린 전인민대표대회(全人民代表大會)는 중국의 당정(黨政)에 소수 남아 있던 보수파(保守派) 인물들 마저 개혁파(改革派) 일색으로 물갈이 하고 있다. 등소평이 실권(實權)을 잡은지 17년만의 일이다. 바꿔 말하면 여느 나라 같으면 당장에 해치울 정치개혁을 17년동안 두드러지지 않게 서서히 진행하여 오늘에야 마무렸다는 것이 되니 대단한 개혁 만만디가 아닐 수 없다.
그동안 실권자인 등소평은 부수상, 부주석, 당고문위 주석, 중앙군사위 주석 등 단 한번도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뒷자리에 있으면서 보수(保守)의 색채를 서서히 차근차근하게 닦아냈던 것이다. 그 개혁속도가 늦다고 불만을 품고 봉기한 것이 천안문(天安門) 사건이요, 그 사건을 무력으로 해결하면서까지 그 개혁 템포를 유지한 것을 보면 가공하기까지 하다.
중국사에서 부도옹(不到翁)-하면 후한시대의 장수 재상 호광을 연상한다. 80세에 이르기까지 안제, 순제, 충제, 질제, 환제, 영제 등 여섯 임금을 섬긴 대신으로 그렇게 장수할 수 있었던 정치철학으로, 예전에 없던 일을 시작할 때면 이를 화로 속의 군밤으로 여기고 화로의 불이 스러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취하는 신중함을 든다. 그래서 성급하지 않고 신중한 개혁의지를 빗대어 호광의 군밤이라 한다. 호광이래의 부도옹인 등소평의 정치철학을 보면서 호광의 군밤 생각이 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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