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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예스'와 '노'

溫故而之新

by econo0706 2007. 2. 16.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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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도청 한국사네팔 히말라야의 오지(澳地)에서 원주민 짐꾼들과 짐값을 흥정을 했을때 일이다.

 

합당한 값을 놓고 이만하면 되겠느냐고 묻자 일제히 고개를 옆으로 빼딱하게 돌리는 것이었다. 우리 한국사람에게 있어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것은 분명히 '노'다. 그래서 1피아스타씩을 더 얹어주었더니 무릎을 꿇고 합장(合掌), 감지덕지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네팔사람들은 '예스'할 때 그 같은 고개짓을 짓는다하며, '예스'했는데도 돈을 더 얹어주니 감지덕지했음직하다. 곧 몸짓말에 있어 네팔사람들의 '예스'는 한국사람들에게 있어 '노'가 되는 것이다. 날로 좁아지는 지구촌에서 이같은 갈등은 비일비재할 것이다.
 
지금 밴쿠버의 미국-러시아 정상회담에서 러시아말로 갈겨 쓴 클린턴 대통령의 메모쪽지가 화재가 되고 있다. 옐친 대통령에게 보내는 이 메모에 '일본인은 경계해야 한다'고 씌어 있었다 하여 일본사람들을 흥분시켰는데 알고보니 '일본인들이 예스라고 대답할 때는 그것이 노를 의미할 때가 많다'고 씌어있는 것이 와전된 것으로 판명되어 일본인의 흥분은 해프닝이 되고만 것이다.
 
비단 일본사람들뿐 아니라 우리 한국사람들의 '예스'도 '노'인 경우가 적지않다. 한국인들 본능적인 욕구-곧 하고 싶을 수록 하고 싶지 않다고 표현하도록 도덕적으로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한말 서울에서 18년간을 살았던 알렌 박사의 회고록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한국사람을 파티에 초대하면 일단은 사양하는 것이 상식이다. 내가 데리고 있는 하인에게 그가 좋아할 만한 물건을 주어도 반드시 '노'하고 사양한다. 내가 초대받아간 한 고관집 자녀들에게 양과자를 주어도 예외없이 '노'했다." 이 한국인의 '노'가 바로 '예스'란 것을 알기에는 많은 세월과 감정적 갈등(葛藤)이 필요했던 것이다.
 
일상의 대화나 상담에서도 '노'란 말을 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반드시 '예스'를 의미하는 긍정전치사구(肯定前置詞句)를 선행(先行)시킨다. 이를테면 지당한 말씀입니다마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마는- 그러해야겠지요 하지만- 하고 '예스'를 하고서 그 다음에는 그렇지 않다는 부정후치사구(否定後置詞句)를 후속(後續)시킴으로써 '예스'와 '노'를 한 대답속에 공존(共存)시킨다. 예스, 노가 분명해야 할 서양사람들이 아리까리해질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모호한 예스, 노의 한계가 정상회담에서까지 쪽지로 몰래 교환해야 할 만큼 이해 못할 일일지는 몰라도 비천한 인간의 욕구를 표출한다거나 자신의 의사를 노골적으로 표출하여 화목해야 할 인간관계를 해치지 않으려는 도덕적 성숙에서 비롯된 동양인의 미덕(美德)임을 알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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