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감(私感)으로 김종직을 모함, 무오사화를 야기해 수백명의 선비를 도륙(屠戮)한 것도 모두가 유자광이 한짓거리이다. 사화(士禍)를 처리한 후 유자광의 위엄은 조야(朝野)에 군림하였고 조정에서는 그를 독사처럼 대하여 감히 그의 뜻을 거스리지 못하고 유림(儒林)은 기운이 꺾여 글읽는 소리마저 끊겼다 했다. 유자광은 연산군의 악정(惡政)서 돋아난 독버섯이요, 연산군의 횡포(橫暴)가 유자광에 의해 증폭(增幅)되었음은 역사의 상식이 되어있다. 그래서 연산군의 악정에 반기(反旗)를 들고 일어난 중종반정에서 처단했어야 할 악신(惡臣) 제1호는 유자광이었어야 했다.
한데 오히려 반정의 공훈(功勳)으로 정국공신이 되었고 그의 아들 유방에게까지 공훈을 내리게하고 있으니 권모술수(權謀術數)도 이 정도라면 고개가 숙여진다. 능지처참(陵遲處斬)당해야 할 자가 공신까지 된 연유에 대해 <동각잡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반정의 모사(謀士) 중에 주모자인 박원종, 성희안 등은 일을 처리하는데 잔꾀 많은 유자광의 지모가 필요하다는 말이 나왔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이 모사를 알리고 만약 숨거나 머뭇거리거나 거절하면 현장에서 처죽이기로 했던 것이다. 대세(大勢)가 반정으로 기울고 있음을 낌새챈 이 여우같은 유자광은 군복을 입고 동참, 거사하는 날 임금이 도망치는 것을 막는 일을 맡고 있다.
그리고 나포된 연산군을 어느 누구보다 모질고 잔인하게 처리토록한 것이 바로 유자광이었다. 임금과 더불어 맨 먼저 처단되었어야 했을자가 그 지경이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유자광으로 대변되는 우리 한국사(韓國史)의 음산한 이면(裏面)의 한 개연성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악신이 정변(政變)을 잘 타서 공신이 되고 매국노(賣國奴)가 시세(時勢)를 잘 타 애국자가 된 사례는 유자광 말고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해방 후 독립유공자로 녹훈(錄勳)된 사람 가운데는 친일(親日) 짓을 한 사람이 적지 않으며, 독립유공(獨立有功)을 심사하는 사람 가운데서도 친일파가 끼여 있었다 하여 6천여명에 대한 공로 재심사를 한다는 보도에 접했을 때 바로 이 가려운 역사의 치부(恥部)를 덧들이는 것같아 섬뜩했다. 유자광이 자행한 사기 녹훈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욕된 역사를 씻어낼 때 때묻힌 자부터 먼저 색출(索出)해 씻어 낸 다음에 유공자를 찾아내는 것이 순리(順理)인데 옥석(玉石)이 뒤섞인 자갈받에서 고르다보니 친일 독립지사가 출현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친일 독립유공자 라는, 논리가 통하지 않은 말을 남기게 되다니 창피해 얼굴을 들 수 없는 역사세대가 되고 마는것 같다. 지금도 줄줄이 노출(露出)되고 있는 역사에 떳떳치 못한 일을 청산(淸算)할 때면 반드시 유의해야 할 유자광 경계론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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