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항구의 명물이요 별미이던 왕고래집 이며 원조 할매집 골목 할매집 등 고래고기집들이 영원히 문을 닫게 되었다. 지난 주 일본 교토(경도)에서 열렸던 국제포경회의에서 상업포경을 전면 금지하고 지금까지 일부 허용되었던 자국의 연안 포경도 일절 금지하기로 함으로써 우리 한국의 포경사가 막을 내린 것이다. 따지고 보면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더니 연간 수천마리씩 잡아대는 열강의 포경전쟁에 연간 겨우 수십마리도 못 잡는 한국 포경업이 거덜난 것이다.
동해의 민요에 고래 잡으며 시집 보내준다던 울 아부지/바다에 나간지 십년이 돼도 돌아도지 않네 하듯 이제 장생포 색시 고래믿고는 영원히 시집 못가게 됐다. 고래에 대한 기록은 유사와 더불어 시작되고 있다. 고구려 민중왕 4년(서기 47년)에 동해에 사는 고주리라는 이가 고래를 임금에게 바쳤는데, 밤에 눈에서 빛이나더라 했다.
불교가 전래된 이래 불경에서 관음보살(觀音菩薩)의 화신(化身)으로 신성시 하는 고래잡이를 엄금하고 그 어구(漁構)를 불태웠다는 기록이 나옴으로써 한반도 연안의 고래들은 불심의 혜택을 받기 시작한다. 고려 때는 원나라에서 특사를 보내 동해안을 돌아 다니며 고래 기름을 수집해 간 것으로 미루어 고래잡이가 없지 않았음을 알겠고, 화란(和蘭)선원 하멜 등과 더불어 조선땅에 표류했다가 탈출한 <에이보켄의 견문기>에 보면 조선 북동쪽 바다에 고래가 많아 출어를 하는데 기다란 작살을 던져서 잡는다 하고, 동해 연안에 파도에 밀려온 고래배를 갈라보면 화란 포경선(捕鯨船)이 쓰는 작살이 나오기도 한다고 했다.
하지만 조선후기의 실학(實學)문헌을 보면 조선에서는 고래잡을 줄은 모르고 떠내려온 놈이 있으면 천금의 수익 모두가 관(官)으로 돌아가기에 백성들은 고래 잡을 생각은 고사하고 고래가 떠내려 왔다하면 부역(負役)이 싫어 도망갈 지경이었다고 했다.
불심과 민폐로 포경문화가 불모(不毛)였던 것에 이웃 일본에서는 이미 18세기에 포경기지를 40군데나 두고 조선고래를 다 잡아가더니 노-일전쟁 전의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에 태평양포경회사를 두고 통천만과 장전진, 장생포 등에 기지를 조차, 연간 2천마리를 잡아 씨를 말리고 있다.
포경에 뒤늦게 눈을 뜬것은 고종 20년의 일이요, 포경의 중요성을 건의한 김옥균을 개척사 겸 포경사로 임명하여 울릉도에 보내고 있지만 아무런 실을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해방 후 연간 3백~5백마리씩의 연안 고래를 잡아 명맥을 잇더니 10년 전후에는 수십마리로 장생포의 별미로 고래문화를 근근이 유지시켰을 따름인 것이다. 우리 연안의 고래들도 우리 민족의 운명과 궤를 같이하여 주변 제국주의의 그물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음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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