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에서 이해하기 힘든 의문 가운데 하나가 오랑캐인 청나라에 자존심 많은 한족(漢族)이 끽소리 못하고 수백년을 지배받았느냐는 것이다.
그 의문은 중국을 통일하고 북경에 천도(遷都)한 순치제로부터 찾아 보아야 한다.
나이 어렸던 순치제는 황제수업으로 낯선 이질(異質)문화인 한학(漢學)을 익히고, 유교(儒敎)문화권의 가치관에 자신을 완전히 동질화(同質化)하고서, 한족도 엄두못냈던 놀랄만한 개혁정치를 수행하고 있다. 그가 감행한 개혁정책을 보면 이렇다. 첫째 원성 높았던 각지의 명산물 공출인 진공을 철폐하고, 둘째 관원들의 오묘한 수탈과 횡포를 색출 근절시킨 것이다. 셋째가 각관 관원 곧 세관이나 재물을 다루는 경제관원의 부패를 대담하게 도려냈고, 넷째가 역체차관 곧 수송기관의 월권과 횡포에 대한 사정이었다.
이 모두 민생(民生)관련 사정(司正)임을 알 수 있다. 그 뭣보다 백성의 환심(歡心)을 산 것은 북경 암흑가의 대두목인 이삼을 처형하고 그 악의 뿌리를 도려낸 것을 든다. 대호(大虎)라 불린 이 대두목은 황족-귀족은 말할 것 없고 관계-재계의 거물과 깊이 손을 대는 한편, 수십 갈래의 악당 조직을 손아귀에 넣고 거액의 상납금을 받아 암흑가에 군림하고 있었다. 그의 조카 이천봉이 사람을 죽였지만 유족측에서 보복이 두려워 그 원통함을 관에 고하지 못했을 정도다. 이삼을 재판하는 법정에서 재판관으로 임명된 장관급 인사 둘이 비호세력으로 드러나자 서슴없이 처단했던 황제였다. 명나라 황제들도 대대로 야합이 불가피했던 검은 세력을 척결한 것이다. 목하 우리 나라에서 진행중인 사정의 흐름과 흡사하여 되뇌어본 것이다.
이처럼 순치제의 개혁은 성공하고 있는데, 우리 역사에서의 개혁은 거의가 실패하고 있다. 중국의 사대주의로부터 탈피하려는 태종의 주체개혁(主體改革), 실천유학으로 도덕입국(道德立國)을 시도한 조광조의 도학개혁(道學改革), 격식에서 실리를 추구하는 흥선대원군의 실사구시개혁(實事求是改革) 그리고 김옥균에 의한 개화개혁(開化改革) 등 우리 역사에서 가장 바람직했던 4대 개혁이 예외없이 실패하고 있다.
도대체 그 성패를 좌우하는 변수가 뭘까? 금력이나 권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요, 부정하고 부패한 것도 아닌 가장 큰 공감대(共感帶)를 형성하고 있는 무언(無言)의 기성(旣成) 기존층(旣存層), 그 층이 지니고 있는 이념(理念)이나 이권(利權), 가치관(價値觀), 도덕관(道德觀)을 불안하게 하거나 자극했을 때 실패로 기울고, 그 기성 공감대에 동질화되어 개혁을 서서히 꾸준히 해나가면 비록 오랑캐 황제도 환호리에 그 문명국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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