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뚱이가 사람 얼굴만 하고 펴놓으면 무려 40~50㎝나 된다는 미국산 황소 개구리가 남도의 늪속을 횡행하면서 각종 국산 개구리며 곤충, 거미류, 수초, 농작물 등을 닥치는대로 먹어치우는 바람에 생태계를 해치고 있어 비상이 걸려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외국 개구리가 우리 자연 생태계에서 횡포를 부리게된 연유는 이렇다. 80년대초 개구리를 먹는 바람이 크게 일자 황소 개구리를 도입 양식을 해왔다. 한데 잘 팔리지 않자 그냥 방치했고 번식력과 생명력이 별나게 강한 이 외래 개구리가 양식장을 빠져나가 전라도 남쪽에서 횡포를 부리며 북상중이라는 것이다. 개구리 이미지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부정적인 측면에서 공통되고 있다.
이솝우화에 개구리들은 제우스신(신)을 찾아가 임금님을 내려주십사하고 청원하자, 무해무득한 나무 토막을 임금으로 내려주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이 임금님을 무시하고 올라타 놀려대곤하다가 활동적인 새 임금을 내려달라고 애원, 제우스신은 물뱀을 내렸고 물뱀은 저들 백성을 모조리 잡아 먹어버렸던 것이다. 악한 임금보다 무능한 임금이 낫다는 교훈을 빗댄 우화에서 개구리의 미련함이 부각되고 있음을 본다.
어느날 토끼들이 모여 사람이나 짐승 독수리들에 잡혀먹히기만 하는 비겁한 신세를 한탄하고 집단 투신자살을 하기로 했다. 늪가에 이르자 개구리들이 놀라 모두 늪속으로 도망치는지라 저희네들보다 더 겁쟁이가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고 자살을 포기했다는 우화도 있다. 개구리가 소의 배를 보고 흉내내다가 배가 터져죽은 폰테느의 우화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개구리 이미지는 부정적이다. '우물 안 개구리'니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을 못한다'느니 정신없이 나불거리는 사람을 '개구리 정신'이라 하는 것이라든가, 시키는 일을 매사 거꾸로 하는 반골을 '청개구리'라 하는 것 등에서 완연하다.
근간 박용성씨가 지은 <꿈을 가진 자만이 이룰 수 있다>는 에세이집에서도 미련한 개구리로부터 기업철학을 가려내고 있음을 보았다. 개구리가 가장 좋아하는 수온은 섭씨 23도라 한다. 이 쾌적한 냄비 물속에 개구리를 넣어두고 서서히 가열한다. 뛰쳐나오고 싶으면 얼마든지 뛰쳐나올 수 있는데도 개구리는 서서히 높아지는 수온에 적응하려 할뿐 끝내 뛰쳐나오지 않고 삶겨 죽고만다는 것이다. 서서히 변하는 상황에 둔감하고 현실에만 적응하다가는 사람이건 기업이건 망하고만다는 개구리의 교훈인 것이다.
남도의 늪을 망치고 있는 비대하고 희멀건 황소 개구리는 자연생태계 파괴의 무법자라는 것외에 전통 문화생태계를 파괴하는 외래 문화 맹신풍조를 상징하는 것 같아 꺼림칙하다. 외래문화란 그 우수성이 취사선택 돼 기존 속에 소화돼야 하는 것이지 기존을 파괴하고서 그 자리를 고스란히 차지하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