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고향 야스나야 파랴나 인근에 톨스토이의 '가방비(碑)'로 불리는 작은 묘비(墓碑)가 있다.
백합꽃 무늬의 가방이 새겨져있는 이 묘비의 사연은 이렇다. 톨스토이가 기마(騎馬)여행을 즐기던 무렵에 있었던 일이다. 어느 시골길 시냇가에 쉬고 있는데 곁을 지나가던 예닐곱살난 소녀가 톨스토이의 허리에 있는 백합(白合)수 놓인 가방을 보고 무척 갖고 싶어 칭얼거렸다. 이에 톨스토이는 그 소녀를 달래며 세밤만 기다리면 갖다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 가방 속에는 여행도구며 애독서가 들어있어 당장에 비워줄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약속한 대로 사흘 후에 이 소녀의 집을 찾아 갔더니 소녀는 그 사이에 급병으로 죽어 매장한 후였다. "소녀는 죽었지만 소녀와 약속한 나의 마음은 죽지않았습니다"하고 무덤으로 안내받아 그 가방을 묘석에 놓고 돌아온 것이다. 후에 이 마을 사람들은 이 사실을 길이 남기고자 톨스토이의 가방비를 세워놓은 것이다. 톨스토이의 대작 한편을 읽는 것보다 감동을 주는 소녀비(少女碑)이야기다.
일본 가나가와시 구보산 중턱에도 톨스토이의 가방비를 교감시키는 사연의 작은 비가 있다. 일본 관동지방에 대지진이 일어 아비규환을 이룬것은 지금으로부터 꼭 70년 전 9월1일의 일이었다. 그 공황(恐惶)속에서 조선사람들이 동란을 일으켜 샘물에 독약을 풀고 다닌다 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조선사람 사냥을 유발한것이다. 그리하여 잔인한 수단으로 조선사람 수천명을 학살했던 것이다. 당시 소학교 2학년생이던 여덟살의 소년 이시바시는 아버지 따라 피난가는 길에 구보산 중턱에 가공할 광경을 목격한 것이 다. 꼭 제 나이 또래의 조선소년이 전신주에 두손을 뒤로 묶인채 처절하게 죽창으로 난자당해 죽어있는 것을 본것이다. 이 소년은 항상 생각해왔다. 많은 일본인이 무고한 조선사람을 제 손으로 학살하고 또 그 현장을 제 눈으로 목격했음에도 입을 다물고 있다. '입을 다문다고 양심이 다물어지는 것은 아니다'고 .
그래서 그는 그 구보산 목격현장의 땅을 사고 사비를 들여 작은 위령비를 세웠다. 그 비석 뒷면에 한 조선소년의 죽음을 목격한 한 시민이 세운다고 새겼다. 18세 때부터 두 다리를 제대로 못쓰는 이 한 시민은 올해로 78세가 되어 바로 이 처절한 광경을 목격한 날인 바로 어제 9월 3일, 작지만 너무나 큰 호소력을 담은 작은 소년비를 찾아가 비면을 닦고 풀을 뽑아주고는 발을 절며 내려왔던것이다. 소녀가 죽었다고 약속한 마음이 죽지 않았다는 러시아의 소녀비(少女碑)나, 눈감는다고 양심도 감아지는것이 아니라는 일본의 소년비(少年碑)가 인도주의 공감대에서 영원할 것이다.
다만 우리 현대 한국인들이 모욕당한 역사앞에 왜 이다지 무기력해졌는 지가 문제로 남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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