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재 민진후가 지금의 법무부장관이랄 형조판서로 있었을 때의 일이다.
어느날 참봉 홍우조의 집으로 시집가 어렵게 사는 누이동생집에 들렀다. 평소 술을 좋아하는지라 누이동생이 술을 내오는데, 안주라곤 김치 하나뿐이었다. 술맛이 좋다면서 맛있게 마시면서 "유주무효(有酒無酵)로구나" 하고 안주 없음을 아쉬워하는 것이었다.
실은 전전 날이 시아버님 홍참봉의 생신날이라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았기로 고기가 남아 있기는 하였는데, 당시에 소를 잡는다는 것은 법으로 금하고 있던 터요, 또 오빠가 법도를 지키는 것이 삼엄함을 알고 있는 터라 차마 내놓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망설임 끝에 나무라지말기를 여러번 다짐한 끝에 자초지종을 말하고 고기를 구워냈다. 실컷 다 먹고 일어서 나오는데, 누이가 옷깃을 붙들고 너무 살피지 말기를 재삼 당부했는데도 문밖에 나오자, 문간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전들에게 "이 집은 송아지를 잡아 범도(犯道)를 했으니 이집 종을 잡아 가두라" 고 시켰다.
민판서는 당시 법대로 종에게 속전(贖錢)을 물렸으나, 홍참봉 집에 그 벌금 챙길 여력이 없음을 알고 민판서 자신의 급료를 털어 속전을 냈던 것이다. 이에 홍참봉이 물었다. "공이 법을 엄하게 지키는 것은 가상한 일이나, 먹지를 말고 잡아 가둘 일이지, 어찌 다 먹고서 가둔다는 말인가"고 묻자, "지친의 정으로 누이가 권하는데 어찌 먹지 않을 수 있으며, 범금(犯禁)한 사실을 아는 이상 어찌 사정(私情)을 쓰겠습니까"하고 자신이 댄 속전은 대납한 것이 아니라, 먹지 말아야 할 장물을 먹은데 대한 벌금이라고 대꾸한 것이었다. 법도 살리고 인정도 살리는 너무나 한국적인 법정신의 구현이라 아니할 수 없는 민판서이다. 그리하여 재판에 인정변수를 작동시킨 판결을 '민판서(閔判書)의 판결'이라 한다.
우리 나라는 예부터 인정이나 삼강오륜의 도리를 법에 우선하는 법정신이 면면히 깔려 내렸던 것이다. 이를테면 인종때 이극명이라는 이가 사람을 죽이고 사형에 처해지게 되자, 그의 동생이 나타나 주범은 형이 아니라 나라고 하여 서로 죽음을 자청하며 다투어 법정을 울리자, 군자도 못할 훌륭한 일이라 하여 특사를 한 것이며, 인조께서는 아버지의 죄를 아들로 하여금 고발케 하고 남편의 대역음모 (大逆陰謀)를 고발한 계집을 오히려 잡아 가두고 애비의 죄를 아들로 하여금 고발케한 형조판서를 파면시키고 있다.
인정우선(人情優先)의 법정신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들이다. 심금을 울리는 나이 어린 두 남매의 편지가 어머니의 공무집행방해 혐의를 가르는 법관으로 하여금 '민판서의 판결'을 하게 하고 보석금을 법관과 검찰이 현장에서 갹출하는 인정법정 이야기가 보도됐다. 딱딱한 법규에 인정변수(人情變數)의 보다 많고 보다 잦은 작동을 보았으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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