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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선장(船長)

溫故而之新

by econo0706 2007. 2. 16.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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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도청 한국사사장이 출근하면 비서는 행사 예정표나 전화 메모를 들고 그 날 일정에 대한 하명을 기다리게 마련이다.

 

예정표를 보면 할 일이 너무 많다. 회의 출석, 출장보고 청취, 현장 시찰, 내방객 면회, 비즈니스 런치, 바이어 방문, 관혼상제 참석, 이빨 치료 등-. 이에 대해 제한된 시간을 유효하게 쓰기 위해 우선순위를 매겨야 한다. 평상시에는 사장이 선호하는대로 차례를 선택하는 특권이 주어진다.
 
이를 강자의 특권이라 하여 라이언즈 쉐어라고 한다. 하지만 위기가 발생하면 우선 순위의 선택 기준이 라이언즈 쉐어로 정해져서는 안된다. 오히려 혐오하는 차례대로 역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지도자의 의무를 노블레스 오브라이즈라 한다.
 
옛 우리 선비의 집에 불이 났다 하자. 맨먼저 구조해야 할 영순위는 바로 조상의 신주였다. 살아 숨쉬는 생명보다 한낱 나무 토막이 우선 되는 것이 우리 선비의 프라이어리티였다. 병자호란에 강화도 선비인 강해수는 납치당해간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아들을 속환 하고자 담배 한짐 지고 멀리 만주땅 심양의 노예시장을 찾아갔다. 한데 담배값이 폭락하여 두사람만 속환할 돈밖에는 마련되지 않았다. 이미 어머니는 돌아가셔서 신주뿐이었는데 조선 사람들은 신주를 산사람보다 더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 산사람과 같은 값을 쳤던 것이다. 이 때 조선 선비 강해수가 선택한 우선순위는 신주와 아우였다. 가장 먼저 선택하고 싶었던 아들을 허허벌판 이역땅에 버리고 돌아설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우리 선비들의 노블레스 오브라이즈였던 것이다.
 
월남전장을 한 때 미국에서 '대위의 묘지'라고 불렀었다. 미군 총 사망자의 12%가 전방 지휘관인 대위였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유럽 군대에 있어 대위는 죽을 확률이 가장 높은 위치에서 싸워야 하는 노블레스 오브라이즈에 투철했던 것이다.
 
침몰한 호화유람선 타이태닉호에서 2천2백명의 승선객중에 7백여명의 목숨을 구조할 수가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선장의 노블레스 오브라이즈와 투철한 프라이어리티 정신이 구현됐기 때문이었다. 떠내려온 빙산에 부딪쳐 선체에 삽시간에 물이 선실로 밀려 들었다. 당시 구명보트는 1천명분 밖에 없었기에 선장은 맨먼저 부녀자들을 태워 보내고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이렇게 마치게 할 수 없다"하여 노인을, "세상 조금만 살고 가기에 억울한" 나이 어린순으로 태워 살려내었던 것이다. 그 생사의 기로에서 선장의 명령에 어느 한사람 저항없이 따라주었다는 것은 인류사에 남을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선장은 살아날 수 있었고 산자 편에서 내려오라고 절규를 했는데도 굳이 죽은자 편에 서 있었고-.
 
위도의 침몰 서해훼리호 선장이 탈출할 수 있었는데도 배를 지켜 시체로 인양되었다는 소식에 접하니 이런 저런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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