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고의 극장인 단성사를 헐고 12층 상영관으로 탈바꿈시킨다는 보도가 있었다.
단성사는 1907년에 목조2층 건물로 시작해서 경술국치 이후 일본사람 손에 넘어갔다가 1910년에 당시 판소리와 창극을 주로 공연했던 광무대 주인 박승필이 인수, 현존 3층건물로 증축하고 영화전용 상영관으로 출발했던 것이다.
단성사가 갖고 있는 기록은 그 밖에도 또 있다. 당시는 연쇄극이라 불리던 한국 최초의 영화상연장이었다는 것도 그것이다. 당시 극단을 갖고 있던 김도산이 단성사 주인 박승필을 찾아가 돈을 얻어 한국 최초의 영화 '의리적구투'를 촬영했고, 이를 단성사에서 개봉했던 것이다. 서울의 인력거는 한 대 예외없이 기생들이 타고 단성사로 몰렸기에 기방은 개장휴업 사태가 계속됐었다.
민족의 울분을 분출시켰던 나운규의 '아리랑'을 개봉한 것도 단성사다. 관객이 종로 기독회관까지 줄서기 일쑤였고, 2년간 연속상영이라는 흥행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 흥행권을 샀던 임수호는 벼락부자가 되어 항간에 '아리랑 팔자'란 말까지 번졌었다.
단성사는 '아리랑'처럼 억눌린 민족감정을 분출시키려는 저의 깔린 흥행창출에 민감했다. 1920년대 단성사에서 손님을 끌어모았던 유각권대회도 그것이다. 미국·프랑스·러시아·인도 등지에서 불러온 권투선수와 일본의 유도선수, 한국의 씨름선수를 맞붙여 시합을 시키는 이색 실내 스포츠다. 흥행의 핵심은 일본 유도선수를 처절하게 패배시킴으로써 잠재된 울분을 분출시키기 위함이요, 그래서 단성사의 열기는 일본 관헌이 개입하려 들었으리만큼 고조됐었다. 한국 씨름선수가 일본 유도선수에게 패배당하면 관중석에서 뛰어나와 대들곤 했던 민족 수난사의 한 존재방식을 단성사가 감당했었다.
부숴 없애기에는 많은 기록과 사연을 간직한 단성사다. 2차대전 중에 폭격으로 박살난 독일 드레스덴의 성모교회는 그 부서진 파편들을 모아 합성시켜가며 옛모습을 되살리고 있음을 보았다. 예비 역사유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나 태도는 원시적이다. 딴곳에 옮겨놓는 일이 있더라도 말살하지 말기를 당국에 당부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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