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파당한 화란 배 한척이 제주도 대정골 해안에 표착했을 때는 64명의 선원 중 36명만이 살아남아 있었다.
표착한 후에도 다섯명 정도가 죽어 그 언덕 어딘가에 묻었으나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이 텐트를 치고 있는데 제주목사 이원진이 병력을 인솔, 이들을 구제하고 있었다.
선원 중 하나인 하멜은 이 관대한 태도를 두고 "우리 많은 기독교도들이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을 정도의 융숭한 대접을 이 이교도들로부터 받았다" 했다. 제주목사는 이미 그 26년 전에 표류 귀화해서 한국 아내와의 사이에 아들딸 낳고 사는 화란선원 벨테브레(한국명 박연)를 통역으로 앞세우고 왔다. 그는 오랜만에 만난 고국 동포들에게 "너희가 새가 아니고는 이 나라를 빠져나갈 수 없다" 하고, "살아보면 정이 들어 살 만한 나라"라고 안심시키고 있다.
이들은 13년 동안 죽기도 하고 남원 순천 여수 등지의 병영에서 귀화한 듯이 더러는 결혼도 하고 살더니 8명이 탈출하고, 그후 7명이 송환되는 등 한명 빼놓고 모두 돌아갔다. 그 중 한사람인 헨드릭 하멜이 견문기인 <한국유수기>를 써 서양에다 한국에 관해 가장 많은 분량의 가장 충실한 내용을 알렸던 것이다. 곧 제주도의 하멜 일행 표류지는 한국과 서양이 만난 최초의 문화 접점이라는 차원에서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때마침 하멜촌을 건설하겠다는 현지 자치단체장의 계획이 보도되었다. 전기 하멜의 기록에는 해안에의 표류광경, 쇠사슬에 묶여 검문 받는 광경, 한국 무복차림의 벨테브레의 목판 삽화도 있어 현장 복구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압송 도중에 거쳤던 제주도 내의 현장도 복구할 수 있어 시리즈 관광코스로 개발해도 인기가 있을 것 같다. 작은 성 앞에서 점심을 먹었다는 그 현장은 지금 대정읍 서편 차귀포 방호소요, 제주에서 신문을 받았다는 마루방은 수군절제사의 영청인 홍화각일 확률이 높다. 또한 이들의 숙소로써 '국왕의 숙부가 종신 유형을 받고 일생을 마쳤다는 건물'이라 했는데 인조반정으로 축출당한 광해군이 유배되어 죽어갔던 집일 것이다.
오랜 위정자들의 역사인식 부족으로 관광자원에 굶주리고 있는 우리나라인지라 하멜촌만한 자원은 대어급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