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0. 16
지난 8월 봉황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 충암고가 1-0으로 앞선 9회초 2사 2루. 덕수고 5번 황민우의 힘없는 타구가 우익수 앞에 떨어지며 안타가 됐다. 2루주자가 홈을 밟아 극적인 동점. 충암고 투수 홍상삼은 마운드에 주저앉았고, 외야를 향해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결국 연장 12회 끝내기 밀어내기 몸에 맞는 공으로 충암고는 이겼고, 이날 호투한 홍상삼은 MVP가 됐다. 홍상삼은 네티즌들로부터 ‘욕상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래도 누군가는 ‘근성 가이’라고 불러주기도 했다.
욕이 난무하는 그라운드는 볼썽사납다. 하지만 고교야구의 매력은 어쩌면 그런 가식없는 승부욕에 있는지도 모른다. 지면 화를 내고, 욕하고, 울고. 이기면 기뻐하고, 소리치고, 또 울고. 실제로 홍상삼은 연장 12회말 1사 1·2루, 승리가 눈앞에 보이자 더그아웃 앞에서 엉덩이를 흔드는 춤을 추고 있었다.
올 시즌 프로야구 SK는 네티즌들로부터 ‘SK 야간 공고’라고 불렸다. 시즌 초반 경기가 길어진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린 선수들이 파이팅 넘치는 플레이를 펼쳐 그런 말을 들었다.
그리고 플레이오프. 진짜 고교야구 스타일은 두산이 보여주고 있다. 선발 라인업 9명 중 7명이 포스트시즌 처음으로 타석에 들어서는 ‘두산고 베어스’. 1루수 안경현과 3루수 김동주를 제외한 센터 라인과 외야 라인 전부가 초짜다.
겁이 없고, 파이팅이 넘친다. 거칠지만 승부욕은 대단하다. 이길 수만 있다면 잠실구장 마운드를 맨손으로 파 엎을 태세다.
두산고 스타일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이들이 수비에 들어섰을 때. 2루수 고영민과 유격수 이대수, 키스톤 콤비는 아웃카운트가 늘어날 때마다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원다이(아웃), 원다이” “투다이, 투다이”. 포수 채상병도 덩달아 신이 난다. 김현수-이종욱-민병헌으로 이어지는 외야라인도 아웃카운트 복창이다.
‘큰(大) 수비(守)’라는 이름과 달리 플레이오프 1~2차전에서 7타수 6안타를 때린 두산 유격수 이대수는 “우리가 다 어리고 경험이 없으니까, 고등학교 때처럼 야구하자고 했다. 소리 한번 더 지르고, 소리 더 크게 지르고”라고 말했다. 경기가 끝나자 그의 목소리는 조금 쉬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고교생으로 만든 것은 어쩌면 동문 같은 팬들이었다. 가을이 되면 자신이 동문임을 새삼 깨닫는 두산 팬들은 잠실구장을 이틀 연속 가득 메웠다.
자신을 또 하나의 ‘동문 선배’라고 얘기한 가수 김장훈은 5회말이 끝난 뒤 단상에 깜짝 등장해 목이 터져라 응원가를 불렀다. 마치 고교야구 결승전 때 동대문구장에서 까마득한 동문 선배가 단상에 올라 교가를 선창했던 것처럼.
이용균 기자 / noda@kyunghyang.com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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