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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34년 전, 세계 정상을 바라본 12명의 당찬 소녀들

--민준구 농구

by econo0706 2022. 11. 9.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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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07. 20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는 여자농구 역사상 가장 빛난 순간을 간직한 ‘영광의 땅’이다. 34년 전인 1985년 8월, 12명의 소녀들이 콜로라도 스프링스 땅을 밟았고, 세계 정상을 향해 거침없이 질주했다. 비록 소련이라는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했지만, 한국여자농구 역사에 있어 가장 빛난 순간이었다.

▲ 제1회 세계여자청소년농구선수권대회 대한민국 명단


감독_故손정웅
코치_김동욱
선수_안미숙, 신기화, 최경희, 이금진, 김혜연, 김용희, 이윤정, 차명신, 이은석, 서경화, 성정아, 박기예

한국여자농구의 전성기였던 1980년대, 아시아에선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고, 국제대회에서도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던 황금기였다. 박찬숙, 박양계, 김화순 등 선두 주자들은 물론 아직은 어리지만, 한국여자농구의 미래로 불린 여자 청소년 대표팀이 있었고, 신기화, 최경희, 이금진, 성정아, 차명신 등이 주축을 이뤘다.

당시 대표팀의 조 편성은 그리 좋지 않았다. 세계 농구를 양분화했던 미국과 소련이 한 조에 속했고, 오세아니아의 강자 호주, 중남미의 다크호스 쿠바와 묶이고 말았다. 180, 190cm대 선수들이 즐비했던 이들에 비해 대표팀의 평균 신장은 175.6cm. 최장신인 이은석이 190cm였다.

김용희와 함께 대표팀의 골밑을 책임졌던 성정아는 “소련에서 뛴 두 선수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둘 다 190cm가 넘었던 거 같은데 체감상 더 크게 느껴졌었다. 미국이나 호주도 신장은 압도적이었다”고 회상했다.

주장을 맡은 이금진 역시 “신체 조건에서는 우리가 밀릴 수밖에 없었다. 대신 기본기나 기술적인 면에서는 우리가 한 수 위였다고 생각한다. (성)정아나 (김)용희가 결코 밀리지 않았었다”라고 이야기했다.

당시 대표팀의 예상 성적은 3전 전패. 모든 이들이 미국과 소련, 그리고 호주에 무너질 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선수들은 미국 전을 승리로 장식하며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전반을 34-44로 내줬지만, 후반에만 42득점을 퍼부으며 76-70으로 첫 승을 신고한 것이다.

이금진은 “높이에서 크게 밀리지 않다 보니 우리가 질 이유가 없었다. 나는 물론 (최)경희, (신)기화가 버틴 앞선은 상대를 갖고 놀 듯했다. 첫 경기를 잘 이겨냈던 것도 중요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해볼 만해서 놀란 것도 있다”고 말했다.

사실 미국 전 승리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숨겨져 있다. 당시 대표팀의 코치를 맡았던 김동욱 대한민국농구협회 부회장은 “그 당시 켄터키 대학을 우승으로 이끈 조. B. 홀 감독이 잠깐 한국에 있었던 적이 있다. 태릉선수촌에서 유니버시아드 대표팀과 청소년 대표팀을 지도했었는데, 그때의 인연이 미국에서도 이어졌었다. 대회 개막 며칠 전부터 미국에서 적응 훈련을 하던 도중, 홀 감독으로부터 저녁 식사를 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때마침 한인 식당에서 선수단 회식이 있어 거절 의사를 밝혔는데 알고 보니 미국과 캐나다의 연습경기를 같이 보자는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미국의 전력을 미리 봐야 한다는 생각에 홀 감독을 만났고, 그들의 강약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신체 조건은 월등했으나, 지역방어에 취약하고 당시 처음으로 도입된 3점슛 시도가 전혀 없는 팀이었다. 그 부분을 잘 파고들면 못 이길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 골밑에서만 잘 버텨주면 3점슛으로 승부를 보려 했고, 아주 잘 통했다”라고 기억했다.

미국 전 승리로 여유가 생긴 대표팀은 당대 최강으로 불린 소련을 상대로 2승째를 따내게 된다. 난타전으로 펼쳐진 소련 전은 이금진과 최경희, 신기화로 이어지는 폭발적인 3점슛 라인이 힘을 냈다. 195cm, 197cm 장신 선수들로 구성된 소련의 트윈 타워는 성정아와 김용희가 육탄 방어로 막아낼 수 있었다.

소련을 꺾었다는 사실이 국내에 전해지면서 언론 역시 많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방송사에선 소련 전을 녹화 방송으로 내보냈다.

대표팀의 선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난적 호주(95-87)를 꺾으면서 4강 진출을 결정지을 수 있었다. 운용의 묘를 선보인 대표팀은 쿠바와의 경기(75-92)에서 패했지만, 이미 조1위를 확정한 만큼 큰 의미 없는 결과였다.

결승 가는 길목에서 만난 건 ‘숙적’ 중국(당시 중공). 예부터 라이벌로 꼽혔던 중국이었지만, 예상외로 그들의 전력은 좋지 못했다. 김동욱 부회장은 물론 이금진, 성정아 모두 “사실 중국과의 경기는 크게 생각나지 않는다. 전반에 크게 이겼던 걸로 알고 있는데 큰 위기 없이 넘긴 것만 기억난다(당시 대표팀은 전반에 50-33으로 크게 앞서며 일찌감치 승부를 결정지었다)”고 전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승 진출, 그 중심에는 3점슛이 있었다. 1984년 FIBA는 3점슛 룰을 정식 도입하게 된다. 이후 여자청소년대회부터 3점슛이라는 변수가 등장했다. 대표팀은 태릉선수촌에서의 훈련 내내 3점슛에 집중했다고 한다.

이금진은 “멀리서 슛을 던질 줄 아는 선수들은 주구장창 3점슛 연습만 했었다. 미국에서 경기를 하는 내내 다른 팀들이 우리의 3점슛을 어려워하더라. 3점슛 자체를 신기해하기도 했지만, 막는 방법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대부분 지역방어를 선호했었는데 우리에게는 너무 쉬운 장애물이었다”고 이야기했다.

정상을 향한 마지막 스테이지에 올라선 팀은 대표팀과 소련이었다. A조 2위였던 소련은 B조 1위 유고를 잡으며 다시 한 번 마주치게 됐다. 당시 여자청소년대회 결승전은 국내에서 실시간 생중계되기도 했다. 그만큼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고, 초대 대회 챔피언의 영광을 기대했다.

이미 조별 예선에서 한 차례 꺾은 바 있지만, 소련은 여전히 세계 최고의 농구 강국이었다. 대표팀의 주득점원이었던 최경희를 막기 위해 하프 코트부터 압박하기 시작했고, 적극적인 골밑 돌파로 수많은 파울을 유도했다. 신체 조건의 우월함을 120% 발휘하며 대표팀을 압박한 것이다.

하지만 대표팀 역시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소련의 공세에 정면 승부를 걸어 경기 내내 리드를 빼앗기지 않았다. 경기 종료 4분여를 남긴 상황, 75-69로 앞서고 있던 대표팀은 승부처 상황에서 아쉬운 장면을 연출한다.

김동욱 부회장은 “모든 스포츠에 ‘만약’이란 건 없지만,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잠을 설친다. 75-69에서 우리에게 확실한 공격 찬스가 찾아왔다. 실명을 거론하기는 힘들지만, 그 선수가 노마크 기회를 놓치면서 잠깐 주춤했다. 교체해야 할지 고민을 하다가 결국 바꿨고, 그 선택이 독이 됐다. 교체로 들어간 선수가 부담을 느꼈는지 연달아 실책 하더라. 남은 시간 동안 추가 득점을 하지 못했고, 연속으로 11점을 실점하면서 75-80으로 패했다. 내 실수가 우승을 준우승으로 바꾼 것 같아 너무 속상했다”며 아쉬워했다.

성정아 역시 “경기 종료 직전에 역전당했다. 경기 전까지는 당연히 이길 줄 알았다(웃음). 크게 잘한다는 생각이 없었고, 신체 조건에 비해 기술적인 부분은 우리가 더 좋다고 믿었으니까. 마지막 순간을 이겨내지 못한 건 너무 아쉽다. 그래도 준우승 역시 명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세월이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고 추억했다.

비록 정상에 서진 못했지만, 대표팀의 막힘없는 질주에 모든 이들이 놀랐고, 박수를 보냈다. 선수들은 언론의 집중 관심을 받았고, 인기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등 당시로서는 최고의 대우를 받곤 했다. 최근 U20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축구 대표팀의 인기와 비슷했다는 게 당시 뛰었던 선수들의 이야기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태극낭자들의 선전. 그러나 첫 대회 이후 성적은 점점 하락했고, 2010년대 들어, 8강 이상은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농구 인기 하락과 함께 여자농구 역시 침체기를 맞이했고, 미국과 소련 앞에서도 당당했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중국, 일본에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다.

어려운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태국 방콕에서 또 하나의 여자청소년농구대회가 열린다. 2019 FIBA U19 태국 여자농구월드컵이 개막한 것이다. 대표팀 역시 한 자리를 차지했고, 헝가리와 호주, 미국과 결선행 티켓을 두고 한 판 대결을 펼친다. 첫 경기는 20일 오후 4시 30분 헝가리 전이다.

이금진은 “예전에도 많이 어려웠지만, 요즘 어린 선수들도 힘든 환경 속에서 운동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세계 대회에서 성적을 내는 게 쉽지 않지만, 겁먹지 말고 제대로 부딪혀 봤으면 한다. 우리보다 키가 크고, 덩치가 좋다고 해서 농구를 잘하는 건 아니다. 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나선다면 우리처럼 기적을 만들 수도 있다. 이왕 간 세계 대회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왔으면 한다”며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성정아 역시 “까마득한 후배들이 먼 곳에서 세계 대회를 나간다니 걱정도 되고, 기대도 된다. 승패를 떠나 코트 위에서 죽기 살기로 하는 멋진 모습을 보여줬으면 한다. 여러모로 많이 힘들겠지만, 선배들이 응원하고 있다는 걸 알고 열심히 뛰어주기를 바란다”며 애정을 보였다.

한때 세계농구의 강호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한국여자농구. 지금은 세월이 흐르며 위치가 달라졌지만, 코트 위에서의 투지와 열정만은 간직하고 있다. 34년 전, 처음으로 세계 무대에 발을 디딘 선배들의 성공 신화는 세계 농구 역사에서도 길이 간직될 최고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반란을 준비하는 U19 대표팀의 발걸음도 한국여자농구의 미래를 밝힐 신호탄이 될 것이다.

 

민준구 기자 minjungu@jumpbal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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